* 본능과 교육의 관계*

 공중전의 본능이란, 지식에서 나옵니다. 아무런 지식의 뒷받침이 없는 생존 본능은 공중전에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본능에만 따른다면 적기방향으로 무작정 스틱을 당겨 무기를 발사하고 싶어지겠지요. 그러나 그런 조종사는 임무에 필요한 만큼 충분히 오래 살아남기 힘듭니다. 공중전의 각종 전술들을 본능적으로 타고나서 실행하는 파일롯은 아마 극히 드물 것입니다. 적어도 교범에서 한번 보기라도 했던지, 아니면 들은 적이라도 있을 겁니다. 설령 태어날 때부터 공중전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조종사가 어쩌다 한두명 있다고 할지라도 모든 조종사가 선천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며, 따라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전투 조종사에 대한 교육훈련을 통한 집단의 전투력 유지가 필요할 것입니다. 집단으로서의 전투력은 한두명의 탁월한 능력보다는 전체 대원의 평균적인 실력이 더욱 중요하며, 교육훈련은 일정한 조건 하에서 전체 대원들의 평균적인 기량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향상유지하는 목적을 가집니다. 영화 탑건에서 매버릭이 교범보다는 본능을 중요시했다고 하지만, 매버릭이 썼던 브렉 기동(사실상 배럴 롤) 최후의 수단에나 어쩔수 없이 쓰는 방어기동인데, 영화니까 멋있게 나온 것일 뿐 방어기동이 백프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으며 일부러 방어기의 위치로 들어가는 것 역시 정상적인 상황하에서의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매버릭 역시 정규조종사과정을 거치고 교범을 몸에 익힌 파일롯으로써, 매버릭이 수행한 기동역시 교범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셈입니다. 오히려 영화에서는 교범을 무시하고 편대를 이탈했다가 동료기와 함께 훈련상의 죽음을 맞이하는 매버릭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군에서의 교육훈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군인들이 받은 교육훈련을 실전에서 이성적 사고에 의하지 않고 본능차원에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이를테면, 사격자세중 엎드려쏴를 가르치는데는 앞에 총 자세에서부터 엎드려쏴 자세까지를 몇 단계로 구분하여 교육시킵니다. 이때 많은 병사들은 하낫 둘 셋 넷 하면서 엎드리는 이런 우스꽝스런 모습이 실전에서 얼마나 소용 있을지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막상 순간적으로 엎드려쏴를 할일이 생기면, 이미 배웠던 단계별 과정을 본능적으로 거치면서 연속동작을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 우스꽝스런 방법이 극히 효율적인 방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낙하산 훈련을 받기 전에 지상에서 깡총 뛰었다가 쓰러지는 착지연습을 수천번 합니다. 그리고 나서 실제로 낙하에 임하면, 착지순간 아무 것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수천번을 반복했던 요령에 따라 몸이 저절로 움직이게 된다고 합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투에서는 각종 교육훈련을 머리로 기억해내고 되살린다는 것은 일종의 사치에 가까우며, 많은 경우에 심사숙고보다는 직관이나 본능적인 행동이 결정적인 성과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공중전투에서 역시 바둑 두는 것과도 같이 심사숙고를 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으며, 순간적인 판단이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고 공중전투라는 환경이 조종사에게 주는 심한 고통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쉽게 할 수 있는 판단이나 사고조차도 극히 힘들게 만듭니다. 시뮬레이션을 하는 가상조종사들은 이러한 고통스런 상황을 겪지 않고도 한손으로는 담배를 피우면서 극한적인 기동을 할 수도 있지만, 가상조종사들에게 역시 상황의 긴박함은 때때로 정상적인 판단력을 흐리게 할 충분한 이유가 되곤 합니다. 이러한 생존본능과 공중전투 이론의 간격을 해소하기 위해서, 조종사들은  공중전투 이론을 완전히 이해하고 몸에 익혀서 새로운 본능으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교범의 이론을 열심히 연습해서 "본능적"으로 익혀야 중요한 실전에서 많은 생각 없이도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즉 그것은 "본능적"이기는 하지만, 본능 그자체가 전투를 이끌어가는 요체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본능적"인 행동이란 사실은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서 조종사에게 심어진 교육훈련의 산출물이기 때문입니다. 교범들에서는 이러한 숙달정도를 "제2의 본능"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간혹 교범이나 공중전과 관련된 글들을 한두번 읽었다고 해서 공중전 전술은 더 쳐다도 안봐도 되고 감각을 익히기만 하면 된다는 사람도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한 번을보는 것과 열 번을 보는 것은 이해도 면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으며, 어떤 하나의 문서가 공중전에 대한 모든 관점을 충분히 설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같은 내용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이 설명하고 묘사한 자료들을 많이 접할수록 그 이해도는 늘어납니다. 그리고 각각의 내용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비행시에 그것들을 응용해보는 것역시 중요합니다.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실제 비행시에 그 모든 지식을 100% 활용하지는 못하고 그중의 극히 일부분씩만을 머리에 떠올리고 시도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사용도 못합니다. 사용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행동은 그 기동이 목표로 하는 바를 정확히 달성해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통신상에 글을 올리는 많은 가상조종사들이 어떤 기동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된 타이밍에 잘못된 방법으로 기동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하소연하는 경우를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때로 그러한 자신들의 행동의 결과가 시뮬레이션과 실제 공중전술간에 명백한 차이가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홈지기의 생각으로는 잘못된 전술의 적용은 원칙적으로 본인 탓이지 시뮬레이션의 재현의 한계때문만은 아닙니다. 교범적인 내용 자체를 모른 상태에서는 더더욱 효과적인 비행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며, 설령 우연적으로 한두번의 기동이 어쩌다 성공적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우연적인 행위의 연속을 기대할 수도 없고 또 그러한 우연적 행위가 교육에 의한 합리적 행동보다 언제나 우월하다고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공중전 교범이란, 이제까지의 공중전투의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책이란 것이 인류의 역사발전과정에서 얻어진 노하우들을 저장하고 기록한 것이듯, 교범이란 것도 하늘에서 떨어졌다거나 실제와는 무관하게 임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상의 수많은 파일롯들의 피로써 얻어진 노하우들을 집대성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범의 문장 하나 하나는 극히 중요하고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며, 논쟁의 소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논쟁과 검증을 거친 가치 있는 정보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교범의 가장 큰 약점이란 교범의 근본 존재 의의가 이제까지의 노하우의 저장과 그로부터 추출된 합리적인 판단을 도출하는 데 있고, 새로운 가설을 연구 발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신기술과 전술을 제때에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파일롯과 군대 조직이 풀어가야 할 숙제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약점 때문에 이미 증명되었거나 증명된 사실로부터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원칙만을 기록하고 있는 교범의 존재가치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사이버파일롯들이 접할 수 있는 문서 정보들은 교범이라기 보다는 시뮬레이션에서 실제로 증명해보아야 하는 가설에 해당하기 때문에, 문서 정보들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범이란, 초보 파일롯을 단시간에 일정 수준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합니다. 구구단을 외우게 하는것과 비슷하지요. (위의 본능에 대한 언급과 관련해 말해보자면, 구구단도 외우고 나면 본능적으로 사용합니다.) 구구단을 외우는 것은 산수를 하는 기초이지만, 구구단이 곧 수학자를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전투조종사가 되려면 교범을 바탕으로 기술을 익혀야 하지만, 교범을 보기만 했다고 되는 것은 아니며 기술이라는 것은 끝도 없어서 교범을 공부하고 이해한 사람끼리 만나면 또 생존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많은 경험과 개별적인 토론에 의해서 교범으로 공부한 사람보다 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이란 수많은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경험을 얻을때까지의 많은 투자와 희생을 감소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이 관계된 전투에서의 경험이란 피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의 교범의 가치는 훨씬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사이버 파일롯들은 경험을 얻기 위해서 실제 자신의 피를 요구받지는 않지만, 각자 경험법칙을 습득할 시간과 노력을 단축시켜준다는 점에서 역시 교범은 의미를 지닙니다. 때로 교범은 실전에서 쓸모없다고도 하지만, 교범을 이해하고 나서야 어느 부분의 우선순위를 뒤로 하고 어느부분을 정확하게 응용해야 하는지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추가로 또한가지 관점을 언급해보자면, 가상조종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높은 격추숫자를 챙기는데 있지 않으며, 시뮬레이션을 통해 여하한 형태의 간접체험, 혹은 그를 통한 지식습득을 하는데 있으므로, 교범이라는 것은 그러한 체험의 원천 혹은 결과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현재 격추숫자가 이론을 무시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기량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아케이드적이라는 것이 되며 그러한 태도역시 완벽한 아케이드 슈팅게이머적인 태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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