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투 기하학 *

기술의 완성도가 극단적으로 높아져서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분야 중 하나로 피겨스케이팅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우수한 선수들의 연기는 보는 사람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지만, 채점은 기본적으로 기술 평가 위주이고 또 수행하는 기술들도 실제로 굉장히 어렵다. 기술들의 이름도 생소하고, 웬만큼 눈이 뜨이지 않으면 그 기술들을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더 고난이도의 화려한 기술을 한다고 하면 더 잘하는 것처럼 생각되기 쉬운 것 같다. 하지만 김연아 선수와 아사다 마오 선수의 라이벌 관계에서 보다시피, 피겨스케이팅에서는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연기하는 것이 난이도 높은 기술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부정확하게 연기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다.

 
화려함은 기본기가 쌓인 결과이다

공중전도 그와 비슷한 것 같다. 공중전 하면 피겨스케이팅처럼 왠지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그 어떤 것처럼 생각되기 쉽고, 그러다 보니 공중전이란 곧 고도로 복잡한 기술이라고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실상 공중전의 개념은 간단하다. 공중전이란 단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적은 나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고 내가 적을 죽이는 것

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내가 있는 줄 모르고 멍하니 가고 있는 적기 뒤로 몰래 다가가서 뒤통수를 후려쳐 죽이는 것도 공중전이다. 아니, 오히려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공중전이다. 적이 나를 쏠 기회를 주지 않고 나는 적을 가장 잘 쏠 수 있으니 말이다. 복잡한 고난도의 기동이 필요할 때가 없지는 않지만, 고난도의 기동은 제대로 성공하기가 더 힘들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고난도의 기동을 하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더 좋다. 그러므로 쉬운 기동부터 정확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기본기가 없이 언제나 필살기만 써서 이길 수는 없다. 적을 그냥 쉽게 죽이거나 피할 수 있는데 일부러 더 어려운 기술을 쓴다고 해서 적기가 저절로 죽어주지도 않는다.

1인칭 FPS에 나오는 보병은 그 자리에서 몸만 돌려서 아무 방향에 있는 적과도 싸울 수 있다. 하지만 비행기는 앞으로 가지 않으면 추락하기 때문에 제자리에서 방향을 돌릴 수는 없다. 적을 쏘기 위해서는 비행을 하면서 선회를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때문에 비행기가 만들 수 있는 비행경로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선회에 필요한 시간과 공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어떤 길로 갈 것인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전투 기하학이라고 한다. 전투기하학은 공중전에서 적을 죽이기 위해 움직이는 방법의 기초가 된다.

1. 추적 곡선
지난 회에서, 선회를 할 때 느슨하게 할 수도 있고 급격하게 할 수도 있으며 이들은 서로 장단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적을 쫓아가기 위해서 선회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적기를 쫓아가는 데는 크게 3가지 방법이 있다. 일치 추적, 선도 추적, 지연 추적이 그것이고 이들 방법은 서로 장단점이 있다.


그림 1. 일치 추적, 선도 추적, 지연 추적

a) 일치 추적
일치 추적은 내 비행기 기수가 똑바로 적기를 향하도록 하고 적기를 쫓아가는 것이다. ‘적을 쫓아간다’고 하면 가장 기본적으로 생각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어로는 퓨어 퍼슛(Pure Sursuit)이라고 한다.


영상 1. 일치 추적

 

그런데 이렇게 적기를 똑바로 앞에 놓고 쫓아가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이렇게 일치 추적을 하려면 적기와 똑같이 따라 움직이면 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적기보다 더 좁게 돌아야 된다. 자동차가 회전할 때 앞바퀴보다 뒷바퀴가 더 안쪽으로 좁게 돌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적기보다 더 좁게 돌려면 적기보다 더 급격하게 선회해야 하고, 그러면 적기보다 손해가 된다. 그리고 적기와 내 비행기의 선회성능이 비슷하다면 무한정 적기보다 좁게 돌 수 없기 때문에, 적기와 내 비행성능이 비슷하다면 적기 꼬리를 제대로 물지 못하고 적기의 반대편으로 지나쳐버리게 된다.

 
그림 2-1. 일치 추적 형태 1 - 적기보다 좁게 돌아야 함


그림 2-2. 일치 추적 형태 2 - 적기 반대편으로 지나침

b) 선도 추적
선도 추적은 내 비행기의 기수를 적기의 앞에다 놓고 적기의 앞을 향해서 가는 것이다. 적기(혹은 아군기)와 거리가 멀어서 상대에게 가까이 가고 싶을 때는 선도 추적을 하면 적기의 앞으로 미리 앞서가는 셈이 되기 때문에 적기에게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다. 그리고 공대공 사격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적기에게 기총을 쏘려면 적기의 앞을 조준해야 적기에게 명중하기 때문에 적기에게 사격을 하는 순간에는 선도 추적을 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울 때는 적기보다 더 좁게 돌아야 하고 적기 반대편으로 지나치게 되는 단점이 일치 추적에서보다 더 커진다. 선도 추적은 영어로는 리드 퍼슛(Lead Pursuit)이라고 한다.


영상 2. 선도 추적

 

c) 지연 추적
지연 추적은 내 비행기 기수가 적기의 뒤쪽을 향하도록 하고 추적을 하는 것이다. 지연 추적을 하면 내 비행기 기수를 빨리 당기지 않고 적기와 비슷하거나 느슨하게 선회를 해도 된다. 그래서 적기의 반대편으로 지나치지 않고 적기 뒤쪽에 더 오래 머물 수 있다. 물론 이 상태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적기를 공격할 수 없기 때문에 무한정 지연 추적을 할 수는 없고 어느 순간에서는 적에게 무기를 발사하기 위해 일치 추적이나 선도 추적으로 기수를 당겨야 한다. 영어로는 래그 퍼슛(Lag Pursuit)이라고 한다.


영상 3. 지연 추적

 

지연 추적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 가지 경우는 적기의 선회를 쫓아가지 못해서 뒤쳐진 채로 선회를 하는 것이다. 이 때는 지연 추적을 하지만 실제로는 적기보다 더 좁고 느리게 돌고 있을 수도 있다. 선회를 너무 무리하게 했거나 비행기 성능이 끝까지 다다라서 더 이상 빠르게 선회할 능력이 없는 경우이다. (아래 그림 1)) 다른 한가지 경우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여유 있게 선회하기 위해 일부러 적기의 뒤쪽을 향해 느슨하게 도는 것이다. 이 때는 선회를 더 빨리 할 여유가 남아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 기수를 당겨서 공격을 실시할 수 있다. (아래 그림 2))

그림 3. 지연 추적의 2가지 형태

2. 위치 관계
공중전을 이야기할 때 적기와 내 비행기의 위치와 각도 관계를 말해야 할 때가 있다.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간단한 약속을 사용한다. 이것은 직접적인 공중전 지식은 아니지만 공중전에 관해 말하고 알아듣는데 필요한 기본 용어이므로 알아두고 넘어가자.

a) 측면각
측면각은 적기가 나한테 꼬리를 얼마나 많이 보여주고 있는가를 말한다. 그리고 적기의 꼬리방향에서부터 각도로 표시한다. 즉 정확하게 적기의 꼬리방향이 보인다면 측면각은 0도이다. 그리고 적기의 옆구리 방향이 보인다면 90도가 된다. 적기의 정면이 보인다면 180도이다. 측면각은 영어로는 에스펙트 앵글(Aspect Angle)이라고 한다.

b) 교차각
교차각은 내 비행기와 상대 비행기의 방향의 차이를 말한다. 적기는 북쪽으로 가고 있고 나는 동쪽으로 가고 있다면 두 비행기의 비행방향의 차이가 90도이므로 교차각은 90도이다. 서로 마주보고 있다면 교차각은 180도이다.

측면각과 조금 혼동이 되는데, 측면각은 내 비행기는 생각하지 않고 적기가 자기 몸의 어느 쪽을 나에게 보여주고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고, 교차각은 적기의 방향과 내 방향을 함께 생각해서 그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영어로는 Angle-off(앵글 오프)라고 한다.

측면각과 교차각을 간단하게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그림 4. 측면각과 교차각

3. 선회 공간
선회를 할 때는 아무리 좁게 돌더라도 어느 정도의 공간이 필요하다. 이렇게 적기 쪽으로 선회할 공간이 모자란 상태에서 선회를 한다면 적기를 향하게끔 선회를 마치지 못하고 적기를 지나쳐버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선회에 필요한 공간을 판단할 줄 알고 이 공간을 만들거나 남기고서 선회에 들어갈 수 있어야 적기의 꼬리를 더 잘 물 수 있다. 영어로는 터닝 룸(Turning Room)이라고 한다. 꼭 영어로만 말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뜻을 가진 말은 아니지만 다른 공중전 글들에서는 혹시 모를 혼동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우리말로 선회 공간이라고 하기보다 터닝 룸이라고 영어로 말할 때도 많으니까 영어 표현도 기억해두자.

 
그림 5. 선회 공간 (터닝 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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