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번역의 책임감" 글에 남기신 좋은 말씀들 감사합니다.
아랫 글은 무책임한 오역으로 인한 문제점을 우려하는 내용이었고, 이번에는 번역일 그자체를 하면서 느낀점을 조금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존 와든의 항공전역을 번역한 박덕희 공대 교수님은 그 책 역자서문에서 전문번역을 하는데는 영어실력, 한국어 실력, 전문지식 이렇게 세가지가 필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점에 저도 심히 공감합니다.
번역은 그냥 자기가 읽는데서 끝나는게 아니고 궁극적으로 완벽한 한국어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맞춤법같은 기본적인 한국어실력은 물론이고 작문실력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점을 간과하는데, 한국어 작문이 안되면 비문이 남발되죠. 흔히 말하는 어설픈 번역체가 나오는 것은 영어실력때문이 아니고 한국어 구사능력 때문입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말 읽을 줄 아니까 문제될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국사람이라고 한국어 작문 다 잘하지는 않죠.. 학부 리포트도 도저히 문장이 성립 안되는 해괴한 작문실력으로 채우는 경우가 흔합니다-_- 물론 학부가 그런걸 배우는과정이기는 합니다만, 한국말 작문도 태어나서부터 누구나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해서 숙달해야 하는 영역이라는겁니다. 저는 다행히도 번역 시장에 나오기 전에 원래부터 글쓰기를 좋아했고 잡지 필자로 출판물에 글쓰기를 하면서 작문실력에 도움이 많이 된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글쓰기와 출판물에 글쓰기는 또 많이 다릅니다) 학부때 교양수업 일부러 많이 들으러 다닌 것도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타과 전공인 철학이나 언어학같은거 혼자 찾아가서 듣고 했거든요.
또, 전문지식이 없으면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오역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어든 영어든 문장에서 어떤 단어, 구, 절들이 문장의 어느 부분을 수식하는지를 문법구조만 가지고는 판정할 수 없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읽는 사람 마음대로 수식을 여기 붙여도 되고 저기 붙여도 되고 그렇죠. 그런 경우 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역나올 소지가 많습니다. 책 한권에 오역이 몇 개만 있어도 신경쓰이는데 문장 두세개 중에 하나가 그런 이유로 인한 오역이라면 전체 글의 컬리티를 따지기가 상당히 힘들게 되고요...
책이나 논문같은건 저자가 그 내용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거나 이해시키기 위해 쓰는 글입니다. 그러면 번역자도 우선 독자의 입장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나서 그것을 한국말로 옮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해에 필요한 기초지식이 필수입니다. 원문이 무슨 말하는지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단어와 문법구조만 한국말로 치환해놓으면 번역기보다 나을게 없죠 -_-
영어실력은 제생각으로는 영한 전문번역에서 오히려 가장 중요성이 낮다고 봅니다. 뭐 영어학원같은데는 다닌 적이 없고 대학 교양영어시간은 자느라고 바빴기에 사실상 고졸 영어실력(이과면서 수학 포기하고 영어 과외만 했습니다만;;)으로 취미로 번역하기 시작한 실무경력만 가지고 일하는 저만 봐도 입증이 됩니다-_- 하긴 저는 그때문에 영한 문서번역이라는 제한된 영역에서만 일하는 핸디캡이 있습니다만...(한영이나 영상번역 같은게 시장에서 페이가 더 셉니다. 좀 먹고살만 하려면 그거 할 수 있어야 하죠...) 한국사람으로서 많이 보게되는 영한에 국한해서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전문서적이야 문장이 긴 만연체는 있어도 문법구조를 파괴하는 문학적 표현이나 새로생긴 슬랭같은 것은 잘 안쓰기 때문에 독해 자체는 오히려 쉬운 편입니다. 문장이 긴거야 번역하기 짜증나고 오래걸리는 요인이기는 하지만 번역 그자체가 힘들어지는 요인은 아닙니다. 한국말 문장이 아무리 길더라도 의미를 이해못하는 경우는 드문 것처럼 말입니다. 또 PC로 작업하는 요즘에는 그냥 구와 절단위로 번역해서 맞는 순서대로 척척 붙여 넣으면 되니까 그렇게 힘든 문제도 아니고요. 팰콘 매뉴얼도 원문의 문장수준은 중고생정도면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진 지극히 평범한 책입니다. 게임 매뉴얼이니 그이상 수준으로 써서는 안되는 책이죠.
사실 제가 작업한 것들도 지금 입장에서는 상당수가 제마음에도 안듭니다. 팰콘 매뉴얼의 경우에는 독해라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던 시절에 작업한거라 원문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는데만도 무척 고생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한글 작문은 그냥 질낮은 번역체 수준이 되어버렸네요.. 팰콘 AF 정발될 때 제가 작업을 맡게 되면 그김에 전체를 새로 작업해서 원작에서 미흡했던 부분을 보완할 수 있었으면 했는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그럴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MCH도 별반 다를 바 없고요. 게다가 MCH는 오역도 많았지요 ㅜㅠ 재교정도 보고 여러 분들이 지적해주셔서 하나하나 고쳐나가기도 했습니다만, 전반적인 퀄리티는 뭐 그저그렇습니다. 노학자들이 젋어서 번역했던 책들을 재번역하는 일들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AOTK와 T-45 FTI가 돼서야 이제좀 원문을 정확히 전달하면서 번역체를 자연스러운 한국말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고요. AOTK는 원문 자체가 교정이 굉장히 잘 되어있는 깨끗한 문장이라 한국말 작문을 하기도 그만큼 쉬웠습니다. 뭐 덕분에 그 작업들 뒤로 자신감 가지고 본격적으로 번역시장에 나서게 된 계기가 되었기도 하지만요.
어쨌거나 영어 잘 못하면서 번역일하는 기형적인 케이스인 저로서는 다른 사람들이 한 작업들 가지고 잘잘못을 따지고픈 생각은 없고요...
세 줄 요약:
1. 전문번역=영어+한국어+전문지식
2. 이걸 모두 갖추려면 많은 노력과 공부, 실무경력 등등이 필요하다
3. 잘해야겠다
P.S.: 번역 시장에 나와보니 취미로 할 때와는 달리 시간=돈이더군요. 근무시간 땡하면 월급받는 직업이 아니다보니 이바닥에서 성공하려면 성실하고 부지런하기도 해야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