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페이지의 "홈지기 소개" 부분에서 오른쪽 삽화들 중에 "전투의 실상"이라는 책 표지를 소개한 것이 있습니다. 이 책은 전쟁 문화학자인 존 키건이 처음으로 쓴 1974년작 "The face of battle"을 육군본부에서 교재로 번역 발간한 것입니다.
이 책을 입수한 것은 우연에 가까웠습니다. 94년 쯤에 방위로 근무하고 있던 어느날 옆 사무실인 대대 행정반에서 대청소를 하고 버릴 책자들을 한박스 들고왔는데, 소각 처분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이리저리 뒤져보니 그 중에 보안 자료같지는 않은 전사 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그래서 허락을 받고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그게 바로 이 책이었습니다. "홈지기 소개" 부분에 돈주고도 못사는 책이라고 하였던 것이 그래서였지요. 퇴근한 날 책을 잠깐 들었다가 놓지 못하고 밤새 완독을 해버렸습니다. 그것이 존 키건과 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얼마전에 "전쟁의 얼굴"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정식으로 출간이 되어있었더군요. 지호 출판사에서 2005년 5월에 초판을 발행하였고 지금 서점에서 초판이 팔리고 있습니다. 1년동안 초판 소비가 아직 안되었나보네요.
인터넷에서 정보를 얼핏 보았을 때는 육본 책자를 가지고 있어서 뭐 다시 살 필요가 있겠는가 했었는데, 어제 서점에 가는 김에 찾아보니 육본판보다 분량이 많더군요. 육본판에서 누락시킨 챕터도 있고, 내용 자체를 조금씩 요약해서 분량을 줄였었습니다. 그래서 선뜻 샀습니다. 아직은 대충만 훑어봤는데, 육본판은 내용이 줄어들긴 했어도 어휘 사용이 자연스러운데 비해서 지호 출판사판은 분량은 원전에 충실한 반면 군사 용어 번역에서 조금씩 매끄럽지 못한 부분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연대"라고 명시해야 하는 단위부대명을 "부대"라고 얼버무린다던가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런 점 때문에 욕먹을 정도는 아닙니다. 사실 이런 저술물이 번역되어나온다는 것 자체에 일단 감사할 일이지요. 1년동안 초판도 안나가는 형편에는 더더욱 말입니다.
참고로 존 키건은 전쟁의 얼굴을 비롯하여 여러 권의 저술물을 낸 석학으로, 여러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이분은 일반적인 개념의 전사 학자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고, 전쟁사를 하나의 문화사로써 접근하는 독특한 시각을 가진 분입니다. 단순히 전쟁사를 분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이해함으로써 앞으로의 전쟁을 없애고자 하는 기대가 뚜렷이 드러납니다. 존 키건의 아버지와 두 삼촌이 1차대전 참전용사이며 2차대전 당시 어린이였다고 하는데, 그런 개인적 경험이 연구에 많이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분의 저작은 상당히 난해한 편입니다. 개별 사건을 단편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시간적인 순서까지 무시해가면서 여러 다른 학문분야를 넘나들거든요. 아테네 전투를 설명하는데 올리브 재배 산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식입니다. 때로는 밀리터리 매니아로서 선뜻 동의하기 힘든 부분들도 있었는데(뿐만 아니라 군출신이 주류인 제도권 군사학계에서도 비판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전반적인 연구 관점을 이해하고 나니 충분히 납득이 되더군요. 지금은 전략전술을 연구하기 위해 전사를 공부하는 직업군인과 달리 단순히 역사를 이해하는 한 방편으로써 전사를 접하는 입장이라면, 직업 군인들의 전문 업무연구를 위해 전사를 기록하고 분석한 자료들보다는 민간인 군사학자인 존 키건의 이러한 관점이 궁극적으로 더 유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논단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군인을 위한 전사는 인간적인 면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경향이 있는데 비해서 존 키건의 저술들은 전사를 논하면서도 인간을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 시각이 존 키건의 영향을 이미 그만큼 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전쟁의 얼굴"은 존 키건의 이러한 일생의 연구 방향이 처음 저술물로 나타난 작품으로서 그의 전사에 대한, 그리고 전쟁에 대한 시각을 잘 느껴볼 수 있는 작품으로 초강추. 입니다. 74년작인 이 책이 후대에 끼친 영향이 실로 막대했습니다. 가까운 예로는 번역자가 후기에서 언급하였다시피, "밴드 오브 브러더스"나 "블랙 호크 다운"과 같은 작품들도 존 키건의 이 저서에서 주장하는 전사 연구 방법론의 영향을 받은 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보문고를 검색해보니 현재 재고가 있는 키건의 저서 번역작으로는 이 책을 포함하여 세 권 정도가 나오네요. 지금은 절판된 것 같은데, 그분의 작품 중 "세계 전쟁사(A History of Warfare)"라는 대작도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그것도 구해보시길 권합니다. "전쟁의 얼굴"이 연구 방향을 보여준 저서라면 "세계전쟁사"는 일생의 연구를 집대성한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