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사를 이해하는 관점 *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소강 상태인 어떤 전선에서 공격을 준비하는 사령관이라고 해보자.
 적의 7개 사단이 방어를 하고 있는 30km 폭의 정면에 13개 사단으로 공격을 감행한다. 이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1500문의 각종 야포로 1주일간 174만 발의 포탄의 공격 준비사격을 가한다. 또한 59대의 전차로 공격을 지원하는 반면, 적군은 대전차 화력은 커녕 전차의 공격이 있을 것조차 상상도 못하고 있다.
 이 공세가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여러분은 밀리터리 매니아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류의 얘기들을 들어야 할 것이다.

 "최악의 전쟁이자 멍청한 전쟁"
 "미련한 진격으로 병사를 불필요하게 많이 죽인 지휘관"

 그리고 남성 잡지 맥심에서는 여러분의 병사들을 이렇게 표현할 것이다.

"닭대가리의 지휘를 받은 불쌍한 병사들"

 위의 공격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분은 사상 최악의 참혹한 전투 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는 솜므 전투를 기획한 사령관의 결정에 동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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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키건의 설명을 빌어 솜므 전투 초일의 상황을 살펴보자.

 "제 10 웨스트요크 연대는... 사실상 전멸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 15 및 16 로열스코트의 2개 대대는... 몇 분만에 수백 명이 사망했다."
 "34 사단의 12개 대대 가운데... 하나는 600 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 당했고, 또 다른 대대는 500명이 손실되었다."
 "제 9 로열 아일랜드 퓨질리어 연대가 최악의 사상자를 냈다. 장교와 사병 532명이 철조망을 향해 무조건 돌격하다가 탄환 세례에 저지당했다."
 "이니스킬링 대대 568명 중... 246명이 죽었다"
 "제 1 뉴펀들랜드 연대는... 장교, 사병을 포함해 710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쟁의 얼굴, 존 키건 저 중에서]                                          

위의 손실들은 공격 개시 후 불과 몇 시간 이내에 적의 기관총 진지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었다. 솜므 전투의 첫 하루동안 13만명의 영국군 공격 병력 중에서 57,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 중 거의 2만명이 전사자였다. 결과만 놓고 보면 지휘관들이 닭대가리 소리를 들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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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솜므 전투를 무능한 지휘관들의 명령 앞에 병사들이 기관총 진지에 자살적인 돌격을 반복하다 떼죽음한 사건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위의 내용들은 단순히 단편적인 body count일 뿐이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첫날의 전투는 조금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다. (단, 이것이 존 키건이 저술을 잘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위의 묘사들은 키건의 저서의 당초 주제에는 충분히 부합하는 사실들이다.)

 위의 존 키건의 설명을 빌린 피해 사례들은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에 대하여 돌격을 감행한 부대들에서 발생한 극단적인 사례들이다. 전체 공격 병력 60개 대대 중 독일군 기관총 진지를 맞닥뜨린 것은 20개 대대였으며, 60개 대대 모두가 이정도의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당시 기관총이라는 것은 지금처럼 소대급에 있는 무기가 아니라 상급 부대 예하에 포병과 비슷한 중화기 병과의 성격으로 편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방어 진지에 기관총 부대가 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전반적인 방어선의 화력과 아군 포병 준비 사격의 효과가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어서, 어느 곳에서는 몇 분만에 대대 병력이 몰살당하는가 하면 사정이 좋은 지역에서는 앞에 총이나 어깨 총을 하고 걸어갈 수도 있을 정도였다. 공격 개시 1일차에 공격군이 전반적으로는 다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여러 곳에서 독일군의 1선 진지를 점령하여 공격 개시 당일에 돌파구를 일부 만드는데 성공했었다. 또한 솜므 전투 전 기간 중 3차에 걸친 공격을 통해 독일군의 최초 방어선을 지나 상당한 거리를 진격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단지 영불 연합군의 진격이 전략적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영불연합군이 전과확대를 하기 전에 독일군이 공격군 병력과 맞먹는 숫자의 대량의 예비대를 투입하였기 때문이었다. 1차 대전의 공격전에서 적의 진지를 일부 돌파하더라도 전략적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대개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솜므 전투 개황 - 출처: 도해 세계전사]

  솜므 전투는 공격 준비 사격을 제외하면 7월 1일부터 11월 18일까지 141일간 크게 3차에 걸쳐 벌어졌다. 이 기간동안 영불 연합군에서는 62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이중 영국군의 피해는 42만명이었다. 영국군만 따지면 전투 첫날에만 5개월간의 총 손실 중의 14%가 발생한 것이다. 총 141일간의 영국군 평균 피해율은 일간 2943명이다. 공격에 최초 투입된 영국군은 13개 사단이었으므로 이 정도의 병력 규모가 계속 유지되었다고 가정하고 계산해보면, 사단 당 일간 226명을 손실한 것이고 사단 병력을 1만명 기준으로 잡으면 사상자율은 일간 2.2%이 된다. T.N. 드푸이의 계산에 따르면 1차 대전 기간 중 사단 급에서의 일 평균 전투 사상율은 2%이라고 한다. 여기서 솜므 전투가 1차 대전의 다른 전투에 비해 피해가 특히 컸던 것이 아님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으며, 공격 병력 중 거의 절반이 사상당한 공격 첫날의 피해 상황이 5개월간에 걸친 전투 전반의 평균적인 피해율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도 역시 명확히 알 수 있다. 솜므 전투 첫날의 전투 모습을 솜므 전투 전반, 나아가 1차 세계대전 참호전의 보편적인 모습으로 간주해서는 안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째서 공격 첫날에 대량의 피해가 발생하였는지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다. 물론 기관총을 비롯한 방어진지의 적 방어화력이 초기의 피해를 상승시킨 국지적인 요인들 중의 하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을 유념해야 한다. 우선, 기관총이 전체적인 전황의 흐름을 만들어낸 직접적인 요인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기관총 진지 정면에서도 공격에 성공한 예가 있는 반면, 기관총 진지를 만나지 않은 공격 부대들도 상당수 공격이 저지되었다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그리고 초기에 돌발적인 피해가 컸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로 인해 7월 1일 당일부로 공격이 일시 중단되었는데 이 때 지휘관들이 초기의 피해를 무시하고 동일한 형태의 자살적인 공격을 무작정 반복하기를 부하들에게 요구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격 첫 날의 독일군의 피해 역시 상당했다는 점이다. 정확한 집계는 없으나 대략 8,000명의 사상자와 2,000명의 포로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주장이 있다. 위 지도에 나오는 영국군 12개 사단 정면의 일선 독일군은 7개 사단 정도였으므로, 프랑스군 전선까지 포함한 수치임을 감안하면 독일군 역시 대략 전체 일선 병력의 1/10정도를 첫 날 상실한 것이다. 물론 영불연합군에 비하면 적은 비율의 손실임은 사실이지만, 독일군 역시 작전 수행에 지장을 받을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고 보아야 한다. 공격군의 대부분의 부대 건제가 지리멸렬해졌음에도 독일군의 체계적인 반격이 시도되지 않았고, 전선이 뚫리거나 독일군이 스스로 전선을 포기한 지역도 있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최종적으로는 쌍방의 피해가 비슷했다.) 전반적으로는 첫 날 공격에서 당초 목표에 도달하는데 실패했지만, 부분적인 성공은 있었다. 지휘관들이 비난을 받을 여지가 있다면 이러한 부분적인 성공을 전과확대로 연결시키지 못하였다는 점이지만, 이건 후세의 분석일 뿐이다. 당시로서는 정확한 정보 수집이나 통신이 어려웠기 때문에 지휘관들이 전장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었다.

 방어진지의 기관총 화력과 닭대가리 지휘관들이 1차 대전을 특히 다른 전쟁 보다 참혹하게 만든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여전히 든다면, 다음 표를 보자.


[시대 별 전투 사상율의 변화 - 출처: 무기체계와 전쟁]

 역사가 흐를수록 무기의 화력이 강력해지므로 사상율이 높아져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이는 무기의 화력이 증가한 반면 부대의 대형이 분산되는 정도가 화력의 증가치를 웃돌아 결과적으로 무기의 실질적인 치사율은 낮아져왔기 때문이다. 이 표에서 이러한 전반적인 흐름을 거스르는 눈에 띄는 꼭지점이 있는데, 보다시피 나폴레옹 전쟁과 남북전쟁이다.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간에 사실상 무기의 차이가 거의 없었음에도 프랑스 혁명 기간 중의 9%(승자)/16%(패자)의 사상율이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15%/20%로 높아졌다. 이는 나폴레옹이 종대 전술을 고집하여 병력 밀도가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에는 군대 대형이 안정되어 사상율이 프랑스 혁명 당시보다 낮아졌으나, 남북전쟁에서는 다시 급증한다. 이것은 군대의 대형 변화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무기의 발전 때문이었다. 즉, 구형의 탄환을 사용하는 머스캣에서 원추형 탄환을 사용하는 라이플로 주력 무기가 바뀌어 화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음에도 별다른 대형의 변화가 뒤따르지 못한 채 기존의 밀집 전술을 고수한 결과 사상자 비율이 높아진 것이다. 일례로, 3일간 벌어진 게티스버그 전투(공교롭게도 솜므 전투와 같은 7월 1일에 시작되었다) 당시 패배한 남군은 28,000/75,000로 37%, 북군은 23,000/83,300으로 28%의 피해를 입었다. 특히 마지막 날 남군에서 실시한 돌격 작전은 12,500명이 1.2km의 거리(솜므 전투에서는 적의 방어선까지 대략 2.5km를 진격해야 했다)를 공격하는 동안 병력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손실을 입고 격퇴되었다. 이는 솜므 전투 첫날의 사상자 비율과 대등한 것이다. 솜므 전투의 독일군에게는 기관총이 있었고 게티스버그의 북군에는 없었는데도 말이다.
 반면 기관총이 실용화된 1차 대전의 전투 사상율은 4%/8% 정도로, 남북 전쟁 당시에 비해 현저히 낮아졌다. 즉, 기관총의 실용화라는 기술적 발전이 실질 사상율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의 가장 큰 원인은 부대 대형이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두 사진을 비교해 보면 남북전쟁 이후 1차 대전에서 부대의 분산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위 사진은 실제 장면이 아닌 리인액트의 한 장면이지만, 충분한 고증을 통하여 보편적으로 묘사되는 당시의 전술 대형이므로 시각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첨부한다.


남북전쟁 당시 대형 - 게티스버그 리인액트 장면


솜므 - 7월 1일 공격 당시 사진

 아래 사진은 측후방에서 찍은 사진이므로 정면에서 본다면 밀도가 더 낮을 것이다. 1차 대전의 보병은 더 이상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집단 표적이 아니라 각개 전투를 수행하는 개별 표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두 사진에서 기관총 사격이 어느 정도의 효과를 가져올지를 각각 상상해보면 전술 대형이 분산될 때 무기의 실질 치사율을 낮추는 결과를 가져오며 1차 대전에서도 예외가 아니리라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전투 사상율 통계에 입각해서 본다면 1차 대전 당시의 지휘관들은 다른 전쟁에 비해서 당시 무기체계의 성능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 전술 체계에 입각하여 부대를 지휘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이 이후로도 부대의 분산은 더욱 크게 이루어져 지금까지 전쟁에서 전투 사상율은 계속 낮아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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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솜므 전투는 포위공격을 받고 있던 베르덩에 대한 독일군의 압력을 해소하기 위한 역습의 목적으로 계획되었으며, 베르덩 남단의 독일군 돌출부를 제거하는 것이 구체적인 목표였다. 이 공격을 위해 주력인 영국군은 맨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병력 집중과 강력한 포병 제압 사격을 준비하였다. 당시는 공격 작전을 위한 포병의 탄막 이동 사격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포병 준비 사격이 적에게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힐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관점으로 보면 지휘관들로서는 병사들을 무책임하게 적진으로 내몬 것이 아니라 주어진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최선의 방법을 추구한 정상적인 작전이었다. 공격군의 지휘관들이 무능해서 다른 최선의 방법을 놔두고 부하들을 무자비하게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이 때 당시에는 이런 방법 아니면 전쟁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포격 속에서 방어전력이 건재할 것으로 예상하기가 오히려 힘들었을 것이다

 전투 초일의 피해가 막심했던  가장 큰 원인을 두 가지 정도 꼽을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1주일간에 걸친 포병의 공격 준비사격이 실제로 적 진지에 미친 영향이 의외로 적어 충분한 제압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이는 지휘관들이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른 돌발적인 사태였고, 공격군에게 다대한 피해가 발생한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던 일이다. 또다른 하나는, 당시 공격에 참가했던 영국군 사단들 중 2/3가 정규군 사단이 아니라 지역단위의 자원병으로 이루어진 2선급 사단이었고 전체 공격 사단의 절반이 단 한번의 전투 경험도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통상의 경우라면 예하 부대간 사격-기동을 연계하여 공격을 실시해야 했으나 이 2선급 사단에서는 그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훈련 수준이 되지 못하여 그 대안으로 전 병력이 일시에 돌격을 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이로 인해서 공격시의 효과적인 전력 발휘가 힘들었던 것은 물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융통성 있게 대처하기가 불가능했다. 똑같은 공격에 참여했으면서도 부대 간 사격과 기동의 협조를 해 나가면서 공격을 실시한 인접 정규군 사단에서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눈에 띄게 적었다.
 솜므 전투가 만약 정말로 무식한 지휘관들이 병사들이 떼죽음할 것을 예견하고서도 강제로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몬 전투였다면, 그리고 수만 명의 공격군이 기관총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간 것이 전투의 전부였다면 독일군이 한두 명 죽을 때 영불연합군은 1개 소대급 이상은 희생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영불 연합군의 총 62만명의 피해에 대해서 독일군은 40만명(독일측 주장) 내지 65만명(연합군측 주장)의 피해를 입었다. 이는 전투가 어느 일방의 학살이 아니라 크게 볼 때 정상적인 진행 과정에 의해 벌어진 보편적인 형태의 전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실제로, 솜므 전투에는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시기 인접 지역에서 벌어진 베르덩 전투를 포함하여 1차 대전의 대부분 기간동안 여러 전선에서 일선 지휘관을 역임한 롬멜의 자서전인 롬멜 보병전술을 통하여 보면 당시의 일선 부대 전투 형태는 현대의 보병 소부대 전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첫날의 대 피해 이후에는 사상율이 감소하였다는 것은 지휘관들이 첫 날의 피해를 감수하면서 무조건 돌격을 계속 고수한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합리적인 대처를 하여 이후로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였음을 말해준다. 또한 전투 결과가 단순히 소모적인 쌍방 희생으로만 끝난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진격에 성공했고, 전선 돌파의 기회도 잡았었다. 포위된 베르덩의 압박을 해소한다는 목표도 달성하였다. 장기적인 측면에서 솜므 전투는 연합군의 우세승으로 간주된다. 단지 결과적으로 볼 때 성공의 정도가 희생과 기대에 못미쳤을 뿐이다. 물론 그정도의 목표를 위해 그정도의 희생을 감수했어야만 했는가 하는 것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2006년의 대한민국의 책상에서 1916년에 솜므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해하는 가장 큰 관점이 인도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납득이 되기는 한다. 솜므 전투가 끔찍한 일이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이란게 원체 그런 것이다. 사람 목숨이 아깝다면 독일에 항복하면 되는 일이었다. 전쟁을 하겠다고 각오한 이상 희생은 불가피하며, 지휘관들은 주어진 조건 하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투 피해는 아무도 정확히 예언할 수 없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1차 대전을 전후한 전쟁들의 전투 사상율 변화 추세를 감안할 때 1차 세계대전과 솜므 전투는 그 추세에서 크게 벗어난 케이스가 아니었다. 1916년 7월 1일의 전투를 미련한 학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른 여느 전투들을 낭만적이기라도 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모든 전투는 다 참혹하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질 당시에는 정말로 그렇게들 생각하기도 했었다. 1차 세계 대전이 개시될 당시에는 참호전이라는 전쟁 양상을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으며 대부분은 단기간의 기동전으로 끝날 것으로 예상했었다. 지휘관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국민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유럽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공짜 해외 여행 체험 정도로 생각하여 자원병들이 러시를 이룰 정도였다. (그 낭만주의적인 자원병들이 바로 솜므 전투에서 죽어간 사람들이다.) 그러나 처음의 예상과 달리 참호전이 되었을 때, 어느 지휘관이나 사병도 그러한 전투형태를 예견하거나 준비하고 있지 못했고 겪어본 적도 없었다. 따라서 1차 대전 당시의 지휘관들이 시도하는 모든 전술은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었고, 그 전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새로운 전장 형태에 적합한 전술을 찾아 나가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휘관들이 결코 책상에 가만히 앉아서 전쟁 승리를 병사들의 피에만 의지하려 한 것은 아니다. 주어진 상황 하에서 참호전을 타개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강구하였다. 전차, 포병 탄막 기술 향상, 소규모 침투 전술, 심지어 독가스마저도 모두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고안되고 시도된 것들이었다.

솜므 전투의 공격 개시가 참혹한 피해로 이어졌다는 결과만을 가지고 지휘관들의 무능을 질책하겠다는 것은 지휘관들이 미래를 예언하는 족집게 점장이었어야 한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며, 전지적인 시점에서 말하는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당시의 시점에 서서 보면, 지휘관들이 닭대가리라거나 미련해서 병사들이 기관총에 떼죽음할 것을 알면서 공격을 시킨 것이 결코 아니라는 증거가 무수히 많다. 솜므 전투 개시 초일의 연합군의 대 피해는 공격군 지휘관들이 지극히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지고 주어진 조건 하에서 지휘관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으나 예상치 못한 결과에 봉착한 사건이었다. (연대장과 대대장들도 공격에 직접 참여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장교들의 피해율이 사병의 피해율을 능가했다.) 어떤 전쟁 어떤 전투에서도, 아니, 전쟁이 아닌 사업에서라고 해도 그때 당시의 주어진 정보를 토대로 아무리 최선의 판단과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했더라도 그것이 항상 최상의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물론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지휘관들이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의 당사자들의 시점이 되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제한된 시점에서 판단한 사항을 현재의 전능한 시점에서 마구잡이로 재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전사 분석을 통하여 용병술을 연구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전사를 접할 때라면 특히 더욱 그렇다. 

 

 * 참고 문헌
 전쟁의 얼굴, 지호 - 존 키건
 도해 세계전사, 한원 - 노병천
 무기 체계와 전쟁, 병학사 - T.N. 드푸이
 참호에서 보낸 1460일, 마티 - 존 엘리스
 전쟁사, 형설출판사 - 김영권
 롬멜 보병 전술, 병학사, 황규만
http://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Somme_(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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