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초기 미 34연대의 지연전 *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6.25
당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24사단
21연대 1대대 + 52포병대대 A포대)가 한국전에 처음으로 참전한 미군 부대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선발대로서 신속하게 파견하기 위해 수송기 편으로 한국에
전개한 스미스 특임대는 당초 7월 1일에 수원 비행장에 내릴 예정이었으나
정찰기의 오보로 인한 혼란 탓으로 부산으로 행선지가 변경되었고, 부산에서 육로로
북상해서 7월 4일에 실제 전투가 벌어진 오산의 죽미령에 진지를 구축하고 7월
5일에 미군으로서 적과 첫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스미스 대대 뒤로 점점 더 큰 규모의
후속 증원부대들이 속속 전전에 투입되어 24사단 34연대가 평택에서,
그리고 그 후에는 24사단이 대전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는 정상적인 용병술에는
어긋나 보이는 축차투입이기는 하지만 소규모 병력이라도 신속하게 투입하면서 적을 조금씩이라도
지연시켜 더 많은 후속부대가 도착할 시간을 벌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불과 2개 중대의 보병 병력을 가진 스미스 특임대는 죽미령 진지에서 전차연대를 앞세운 사단급 병력의 공격을 맞아 7시간 가량 방어전을 치른 후 진지 양측면이 포위되자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대대장의 전술적 결심에 따라 철수를 했으며 이 과정에서 퇴로가 적의 화력에 노출되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 패배를 두고 스미스 특임대가 군기빠진 오합지졸이었다고 묘사하는 자료도 일부 있지만, 21연대 1대대는 전쟁 전에 있었던 전투준비태세 검열에서 합격한 부대이고 대대장도 이름있는 지휘관이었다. 사단 선발대로 뽑힌 것도 그래서였다. 스미스 특임대는 실제 전투에서도 압도적인 적에게 맞서서 후퇴 명령을 받을 때까지 끝까지 진지를 지켰다. 단지 그들로서는 벅찬 다수의 적을 맞아 싸웠기 때문에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
미군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 - 대전역
34연대
반면 스미스
특임대의 후방인 평택에서 첫 전투를 치른 34연대는 포위될 때까지 최대한 버티면서
끝까지 싸운 스미스 특임대와는 달리 연대의 첫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고
후퇴를 해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34연대는 24사단장 딘(Dean) 소장의 지시에 따라
연대장 로블리스(Lovless) 대령의 지휘 하에 평택선에 배치되었으며 1대대는 평택에,
그리고 3대대는 그 우측인 안성에 배치되어 경부축선에서 아산만까지를 방어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34연대 1대대는 적과의 전투가 시작되자 스미스 특임대처럼 적극적으로 방어전투를 시도하지 않고
약간의 교전 후 하룻밤만에 무려 20km를 후퇴해서 천안까지 내려가 버렸고 3대대는
적과의 접촉이 없었는데도 천안으로 철수했다. 그러자 이에 분개한 사단장이
지휘책임을 물어 연대장을 곧바로 해임하고 2차대전 당시 딘 소장과 함께 싸운
경력이 있어 믿음직하게 생각하던, 일본에 있던 마틴(Martin) 대령을 급히 소환해서
임명했다. 이때 얼마나 급하게 소환을 했던지 전투복과 군장도 챙기지 못하고 급히
달려오느라 정복에 단화를 신고 현장에 부임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이 그정도로 급박했던
것이다.
24사단장
Dean 소장
그런데, 조금 부연하자면 34연대의 이런 소극적인 최초 전투는 단순히 연대장이 무능했다고만 설명하기 힘든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다. 34연대보다 앞서 전투를 치른 스미스 특임대는 최선을 다해 끝까지 싸우기는 싸웠는데 측면을 포위당하고 퇴로를 노출당하는 바람에 철수 중 중화기를 상실하고 부대가 와해되는 지경을 겪었다. 그래서 A포대와 동행했다가 스미스 대대의 전투 개시를 직접 참관했던 24사단 포병단장인 바스(Barth) 준장은 평택의 방어를 맡은 34연대 1대대장에게 스미스 특임대에서 보다시피 포위당하면 얼마 못버티고 궤멸될 것이니 최대한 버티되 포위될 것 같으면 철수하라고 지시를 했다. 그래서 1대대장은 전차부대를 동반한 2개 연대의 북한군(앞서 스미스 특임대와 교전했던 북한군 4사단)과 교전이 시작되고 수적으로 우세한 적이 포위기동을 할 조짐이 보이자 지체없이 후퇴를 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바스 준장은 우세한 전투력을 가진 적에 대해서 평택-안성의 넓은 정면에서 방어를 하기보다는 천안에 집결해서 싸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서 전투가 없었던 3대대를 1대대가 후퇴한 천안으로 후퇴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러한 바스 준장의 현장 판단은 그자체만으로는 타당성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기에 후퇴하는 것은 평택선을 지형상 요충으로 판단했던 사단장의 의도와는 배치되는 행동이었고, 포병단장인 바스 준장이 보병연대에게 지시를 하다보니 지휘계통에 혼란이 초래되었으며, 사단장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 현장 조치를 사단에 보고하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현장 지휘관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이러한 사정을 모르고 있던 사단장이 자신의 의도와 어긋나는 행동을 한 책임을 물어 연대장을 해임했던 것이다. (34연대가 평택에서 후퇴한 것을 비판하는 시각들은 대략 사단장의 관점에 가깝다). 덧붙이자면 이 당시 평택에서 천안으로 철수한 정황 설명이 자료들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이는 곧 여러 증인들이 당시의 상황을 서로 다르게 이해했다는 것이므로 홈지기에게는 당시 정황이 그만큼 애매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평택
전투
그 후 34연대는 사단장 명령에 따라 다시 북상하려 했지만 타이밍을 놓치고 천안에서 방어전을 치렀다. 천안 전투에서 신임 연대장 마틴 대령은 적 전차가 천안 시내에 난입한 혼란 속에서 직접 2.36인치 대전차로켓발사기(=바주카)을 들고 전차와 대결하다가 전사했다. 연대장 마틴 대령에게는 사후에 수훈십자훈장이 추서되었다. 이 글을 쓰면서 텍스트를 다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자료에서인가 주변에 2.36인치 로켓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연대장이 직접 나섰던 것이라고 본 것 같다. 34연대는 전차부대를 동반한 사단급 병력을 맞아 하룻밤 정도 천안에서 버티다가 큰 피해를 입고 결국 중과부적으로 철수했다.
천안
전투
34연대는 초전에 지휘계통의 혼란을 비롯해서 상황이 안좋은 방향으로 꼬인 바람에 사단장이 의도한 바대로 적극적인 전투를 하지 않고 첫 방어선인 평택을 내줬고 그때문에 연대장이 교체되는 지경까지 겪었다. 하지만 연대장이 교체된 후에는 사단장 의도에 따라 지연전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천안 방어전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그것은 적을 조금이라도 더 지연하기 위해서 불리한 상황에서도 가급적 방어선에 남아 싸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피해를 줄이려면 일찍 후퇴하면 되지만, 적을 지연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중과부적의 상황에서라도 가급적 오래 남아서 싸워야 하고 피해도 각오해야 한다. 실제로 스미스 특임대는 너무 늦게 후퇴해서 큰 피해를 입었고 그걸 본 34연대는 반대로 평택에서 너무 일찍 후퇴해서 효과적인 지연에 실패했다. 이 서로 반대되는 영향 사이의 최적의 절충점을 찾아서 지연 효과도 적절히 얻도 하고 부대도 온전히 보존한다는 것은 난해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쟁의, 특히 개전 초기의 고질적인 불확실성으로 인한 혼란을 감안한다면 34연대의 전투는 이상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고 지리멸렬된 것도 역시 아니었다. 불리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투입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34연대에게는 애당초 주도권이 없었다. 그리고 당시는 신속배치군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고 미군의 평시 전쟁 즉응태세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초전에 투입된 부대들이 특히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적은 병력으로라도 신속하게 전장에 투입되어 가급적 북쪽에서 적을 지연하여 후속부대를 증원하기 위한 시간을 버는 것이 개전 초기에 투입된 미군 선발대들의 임무였기 때문에 이러한 일련의 패배들은 불가피했다. 당시의 미군의 군기나 준비태세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가해지고 있지만, 효과적인 대전차무기도 보유하지 못한 대대나 연대, 사단급 부대가 전차를 앞세운 수 개 사단의 진격 루트를 막아서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는 누가 지휘하는 어느 부대가 투입되었더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초기 전황의 흐름 자체는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각 부대들의 준비태세가 미흡했음에도 어느정도의 전투부대 기능을 유지했던 것에는 직접 무기를 들고 솔선해서 전투를 이끈 사단장 이하 간부들(거의 대부분이 2차대전 참전 경험자들이었다.)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신속대응군
미군은 한국전 초기의 패전을 뼈아픈
교훈으로 삼고 있다. 그 교훈이란 만용을 부리지 말라는 것이나
전장 군기를 확립하자는 것 같은 정훈교육적 관점이 아니고, 평시에 전쟁 준비태세를 확립해야
한다는 작전적인 관점의 것이다. 냉전 이후의 미군 전략은 우발사태에 대한 신속한 대응능력을 매우
중요시하는 추세이다. 그래서 급파된 선발대들이 치른 6.25 초기 전투를 특히 반면교사로
삼고 있다. 2000년대 초 미군의 신세키 육참총장은 전투 준비가
된 여단을 96시간 이내에, 사단을 120시간 이내에, 5개 사단을 30일 이내에 전 세계
어느 곳으로든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즉응태세의 목표로 하고 그에 따라 부대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만약 6.25 개전 당시 미군에게 이정도의
신속대응능력이 있었다면 아마 초기 전황이 그렇게까지 혼란스럽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신세키 총장이 산파 역할을 한 스트라이커(Stryker) 여단에 대해서 현대전에 경장갑부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상당한 비판을 종종 접하기도 하지만, 6.25 전사에 비추어서도 그런 형태의
신속대응부대 개념을 설명할 수가 있을 것 같다.
C-130에서
내리는 스트라이커 장갑차
6.25 개전 직후 미 극동군 사령부는 당초 지연전을 위한 선발대로서 전차중대와 포병대대를 동반한 연대전투단을 한반도에 공수(이 글에서 공수는 낙하산 투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수송기편으로 수송하는 것을 의미함)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런데 수송기가 부족하다보니 연대전투단급 부대를 몇 대에 불과한 수송기로 왕복해가면서 수송하느니 차라리 배로 보내는게 빠른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연대 전투단을 보내는 대신 일단 가용한 수송기로 보낼 수 있는 병력만큼의 선발대를 편성해서 먼저 보내라. 이렇게 되어서 당초 연대전투단을 보냈어야 할 임무에 불과 2개 중대와 1개 포대만을 파견한 것이 스미스 특임대였다. (그나마 52포병대대 A포대는 본대와 별도로 해상을 통해 부산으로 상륙했다가 스미스 특임대의 전선 이동이 늦어지는 바람에 중간에서 특임대를 따라잡아서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지원화력도 부족하고 방어진지 크기도 작았던 스미스 특임대를 적 보병이 불과 두어시간 만에 쉽게 포위할 수 있었고 부대가 수 시간만에 궤멸되고 말았던 것이다. 만약 이 당시에 미군에게 충분한 수송기가 있었다면 대대전투단인 스미스 특임대가 아니라 당초 계획대로 연대전투단을 선발대로 투입할 수 있었을 것이고 지연전이라는 초기 전황을 바꾸지는 못했겠지만 독립 전투부대로서 좀 더 효과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면서 스미스 특임대보다는 더 나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스미스 특임대는 한반도에 공수로 전개하여 자체 수송수단이 없이 전장에 투입되다 보니 측면이 포위된 상황에서 적의 화력에 노출된 퇴로를 통해서 도보로 후퇴를 해야 했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중화기를 버려야 했고 부상자도 그자리에 남겨둬야 했다. 그래서 철수 초기만 해도 군기를 유지했지만 부상당하면 낙오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결국 철수대열이 질서를 잃는 상황이 되었다. 이 때 스미스 특임대가 병력수송장갑차를 보유했거나 하다못해 트럭이라도 있었다면 후퇴의 와중에 부대가 와해되는 일을 피하고 철수 작전을 좀 더 질서있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전장에 선발대로 투입되는 신속배치군의 요구사항을
읽어볼 수 있다. 우선 작전지역에 신속하게 투입하기 위해서는 공수가 가능한 병력이라야
한다. 그러면서도 상대적으로 소수의 부대로 효과적인 지연전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치고 빠질 수 있는 기동성과 적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화력이 필요하므로 가급적 기계화되어야 한다. 또한
대형 수송기는 가용 수량이 적어서 6.25 초기 전개 시에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부대를 제한된 수의 수송기로 공수하자면 차라리 배로 가는게 빠른 상황이
발생하므로,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C-130급으로 수송이 가능해야 높은 즉응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공수 전개 능력과 관련된 연구사례는 미 의회예산처가
발간한 이
자료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요구사항들을 종합하다보니 자연히
신속배치군 용도로서 C-130급 수송기로
수송 가능한 경기계화 부대를 만들자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현대 미 본토 주둔 전투부대 장비의
동아프리카 전개 소요 시간 (단위: 일)
(출처: 위의 미 의회 보고서).
*
1. 지원부대 또는 보급품 이동 소요시간은 제외
2. 무제한”
및 “제한적”은 장비 수송을 위한 일간 소티 수가 공항의 항공기 수용 및 화물 취급
능력에 의해 제한되는지 여부를 의미.
지연전
예비역들은 전방 사단들의 임무가 5분을
버티는 것이라는 류의 얘기들을 자조적으로 나누는 것에 익숙할 것이다. 사단이 5분을 버틴다는 수치가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는 작계를 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대략적인 개념을 좀 더 와닿기 쉽도록
설명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일선 소대가 1분도 못버티고 깨진다고
해보자. 그러면 중대도 대비할 시간이 전혀 없으므로 중대 역시 몇 분도 못버티고 깨질 것이다.
그러면 대대도 쉽게 깨지고 연대도 깨지고 국군 전체가 순식간에 줄줄이 깨져나간다.
다르게 표현하면 적에게 작전 템포를 뒤쳐져서 계속해서 선빵 맞고 궤멸하는 것이다.
반면 소대가 5분쯤 버티고 죽는다고 해보자. 그러면 중대가 그 5분동안 준비를 갖출
수 있으므로 앞의 경우에서보다는 좀 더 잘 싸울 것이다. 그래서 한 30분 버텼다고 해보자. 그러면
또 대대는 그 30분동안
더욱 충실하게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일선부대가
얻은 5분은 상급 부대로 올라갈수록 10분이 되고 한시간이 되고 하루가 되고 1주일이 된다.
그러다보면 궁극적으로는 적의 작전 템포를 무너뜨리고 우리가 주도권을 얻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최일선 부대가 5분을 버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물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틴
후에 가급적이면 전력을 보존한 채로 다음 진지로 철수해서 지연전을 지속할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그렇지만
앞의 34연대의
예에서 보았다시피 병력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접전이 더 격화되기
전에 철수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시간 지연 효과가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한반도 전장은 2차대전 당시의 소련처럼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얻는 방법을 쓸 정도로 종심이 깊지 않다.
그러므로 시간을 얻자면 천상 병력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다. 때문에 최일선 부대는 단
5분을 버텨내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전멸할 것까지도 각오하고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얼마든지
처할 수 있다.
1950년 7월 초에 한반도에 투입된 미군 부대들이 그랬다. 대한민국 육군 일선 소대들이 전멸을 각오하고 싸워서 5분을 벌어야 하는 것 처럼, 스미스 특임대도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적과 맞서 7시간을 벌었고 34연대는 천안에서 하룻밤을 벌었다. 24사단도 대전에서 적시에 후퇴하려던 사단장의 희망과는 달리 1기병사단이 도착하는 7월 20일까지 대전을 지키라는 상급부대의 명령을 받고 이를 완수하기 위해서 1개 기갑을 포함한 3개 사단의 포위공격을 받으면서 정해진 기일까지 대전을 사수했고 그 과정에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지연전이란 다르게 표현하자면 일련의 패배를 반복하는 것을 뜻한다. 지연부대의 역할은 말그대로 적을 늦추는 것이다. 적을 저지하거나 전황을 뒤집는 것은 지연 부대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전투준비 태세가 충실했다면 초기의 피해를 더 줄일 수 있었을런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들이 치른 희생적인 전투가 있었기에 시간을 조금씩이라도 벌어서 그동안 도착한 후속 부대들이 결국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었고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대전
전투
미군이 전략적 신속대응능력을 추구하면서 6.25의 초기 전사를 사례로서 연구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다음에 더 잘 싸우기 위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 과거의 사례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할 필요성은 물론 크다. 하지만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맞아 싸운 이 부대들이 큰 피해를 입고 패전했다는 결과만을 놓고 이들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전사를 읽는 것은 전투에서 싸운 장병들의 잘잘못을 따져서 심판하는 염라대왕 노릇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때 당시의 전사를 읽다보면 미군이 북한군을 얕잡아봤다는 얘기도 많이 접하게 되지만, 그것은 전황의 흐름에는 직접적 영향을 끼치지 않은 부수적인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미군 선발부대들이 북한군을 얕잡아보고 만용을 부렸기 때문에 패했다고 하는 것은 미군이 정신자세만 가다듬어져 있었다면 수 배 이상의 적을 맞아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으면서 더 잘 싸우거나 적을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 그랬어야 한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홈지기는 그런 생각이 오히려 북한군을 얕잡아 보는 것에 다름아니라고 본다. 미군은 북한군을 만만하게 보아서 준비도 채 갖추지 못한 소수 병력들을 전장에 축차 투입한 것이 아니었다. 34연대, 그리고 스미스 특임대와 24사단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서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것은 적을 지연하는 것이었다.급박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준비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로 투입되어 많은 시행착오와 혼란을 겪고 그 과정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작전상 불가피하게 중과부적의 적과 맞섰고 그 결과를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 참고 자료
교참
35-1 한국전쟁사, 육군 교육사령부
6.25
전쟁사 제3집 = 한강선방어와 초기지연작전, 국방부
미
국방부 한국전 50주년 기념 홈페이지
Task Force Smith the Lesson Never Learned
Korean War: Forgotten 24th and 34th Infantry
Regiments
A
CBO Study: The
Army’s Future Combat Systems Program and Alternatives
The
Korean War
한국전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일월 서각 - 조셉 굴든
한국에서의 소부대
전투, 병학사 - R. A. 구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