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년 8월 15일자

비행 시뮬레이션의 역사 (상)

 뾰족 뽀족 솟은 산봉우리 사이로 위성사진 캡쳐된 논밭을 지나 텍스쳐 입혀진 적기에게 미사일 공격을 가한다. 3D 엔진소리와 파괴소리, 교신음성이 귓전을 때린다. 이 모든 것은 불과 17인치(혹은 19인치)상에서 벌어며, 양 손은 HOTAS System 위에 얹혀져 있고 두 발은 러더를 차기에 여념이 없다. 손과 발, 그리고 눈과 머리가 모두 바쁘다. 다른 게임들과는 달리, 비행시뮬레이션은 PC상의 3D세상에서 일종의 버츄얼 리얼리티를 제공해준다. 아직 가정용으로서는 비싼 감은 없지 않지만, 심지어는 게임영업장에 있는 10분당 수천원 하는 가상 현실 기구에서나 볼법한 버츄얼 헬멧도 많은 비행시뮬레이션에 지원된다. 본격적인 3D게임으로서는 비행시뮬레이션 말고 3D액션게임들이 있지만, 게임으로서의 재미를 배제한 완성도나 현실세계의 재현으로만 따진다면 비행시뮬레이션은 가히 가상현실 그자체인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PC가 구현하고 있는 일반적인 전투비행시뮬레이션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행시뮬레이션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최고의 게이머라고 자부한다. 아니, 그중에서도 열렬한 매니아들은 스스로를 게이머가 아닌 "사이버 파일롯"이라 부른다. 실제로, 비행시뮬레이션은 PC의 최고 사양을 요구하고 그어떤 오락보다도 고도의 장비와 해박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점은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들이 스스로를 일반 게이머와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중 하나이다. 비행시뮬레이션은 한마디로 컴퓨터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멀티미디어의 총아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비유적으로 쓰는 표현중 하나가, 비행시뮬레이션을 돌릴때마다 "주인님 오늘도 제 성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컴퓨터가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에게 감사한다는 것이다. 이의 진위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컴퓨터에게 생각이 있다면 그럼직도 하다.

 이렇게 시스템에 의해서 매우 많은 영향을 받는 비행시뮬레이션의 역사가 컴퓨터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불과 3년전의 시스템이 제공했던 비행시뮬레이션 환경은 지금의 기준으로는 영화 쥬라기 공원앞의 우뢰매와도 비슷하게 치부되곤 한다. 이제 새로운 밀레니엄에 어떤 시스템이 얼마나 사실적인 버츄얼 리얼리티를 제공할 것인지, 단지 소비자이고 기술의 수혜자일 뿐인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 팰콘4.0이 불과 6개월 전에 나왔을때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대체 이런 고사양을 요하는 것을 누구네집 컴퓨터에서 돌리란 말인가라며 흥분했었다. 펜티엄 III와 부두3가 나오지도 않았거니와 나온다고 해도 재벌아들이나 살 수 있는 고가품으로 인식되던 때였다. 그러나 고작 수 개월만에 부두3는 대중화되었고 펜티엄III를 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요즘 개발되는 시스템은 현재의 그래픽을 한낱 이발소에 걸린 유치한 풍경화나 혹은 원시시대 벽화정도로 치부하게끔 하기에도 충분해 보인다. 이렇게 불과 수개월의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바에야 소비자는 그냥 굿이나 보면서 떡이나 먹는게 편할 것 같다. 대신, 필자는 어디로 갈지도 알 수 없는 미래로의 여행대신 과거로의 여행을 해보기로 하겠다. 저옛날 유명한 미국 TV 미니시리즈 "뿌리"에서 미국 흑인 소설가가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자신의 먼 조상을 찾아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는 마음가짐으로 말이다.

선사시대

 비행시뮬레이션의 과거를 논하는데 있어서 그 뿌리를 어디까지 거슬러올라갈 것인가? 사막 한가운데에서 화석조각 하나로 지구의 기원을 추론하듯이 말해보자면, 그 뿌리는 컴퓨터의 태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컴퓨터의 태동이라니? 컴퓨터는 2차대전때 암호해독을 위해 만든게 아니었던가? 맞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냥 암호해독기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미 국방부는 2차 대전당시 조종사 양성을 위해서 항공기 시뮬레이터를 운용했다. 그당시 시뮬레이터는 기계적인 단순한 것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장비가 하나의 기종만을 훈련시킬 수 있었고, 여러 대의 항공기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는 여러종류의 시뮬레이터를 장비해야 했으므로, 당시의 똘똘한 박사들에게 하나의 시뮬레이터로 여러 가지의 기종의 항공기를 훈련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애드벅이니 애니악이니 하는 초창기 컴퓨터 프로젝트가 탄생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매우 조잡한 당시의 컴퓨터이지만 크기로는 명실상부한 슈퍼컴퓨터이다.

 그런데 대체 이런 얘기가 왜 중요한가? 생각해보라. 컴퓨터가 나오고 비행시뮬레이션이 생긴게 아니라, 비행시뮬레이션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컴퓨터라니, 컴퓨터가 주인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겠는가! 통상 전략 게임의 시초는 실제 군사용 워게임을 군인들이 집으로 가져가서 취미로 즐기기 시작하면서라고 알려져있다. PC 비행시뮬레이션역시 그 태생이 실제 시뮬레이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실제 비행시뮬레이터를 집으로 가져가 즐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능의 향상에 의해 컴퓨터가 다른 가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발전되는 동안에도, 원래의 목적이었던 비행시뮬레이터의 용도로 훌륭하게 쓰였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이다.

 PC환경이라는 것은 전체 컴퓨터의 역사로 보면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대중화 되기 시작한 것이 대략 80년대 초반부터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컴퓨터가 회사나 연구소에서 가정집 안방으로 들어오는 순간을 추측해볼 수 있다. 회사나 연구소에서 비행시뮬레이터가 중요한 컴퓨터의 용도중 하나였다면, 그쪽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이 가정용 PC환경에서 돌아갈 수 있는 비행시뮬레이션을 만들고자 노력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추론 가능하다. 물론 그시절에 가능했던 완성도 여부는 차치하고 말이다. 비행시뮬레이션의 화석을 주우러 다니던 필자는 그러한 고대 화석의 파편들 비슷한 것들을 어느정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비행시뮬레이션의 고대화석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게임에서의 고대 화석은 필자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즉 70년대 중반에 국내에 대중화되기 시작한, 막대기와 사각형 공이 움직이는 축구, 탁구 게임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비행 슈팅게임의 화석은 아마도 인베이더일 것이다. 인베이더는 진화해서 겔라그가 되고 겔라그가 진화해서 라이덴이 되고, 라이덴이 진화해서 3차원 비행슈팅게임인 애프터버너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외형적인 모습이 3차원 슈팅게임과 비행시뮬레이션이 매우 흡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혼동할지라도, 비행시뮬레이션의 계보는 이러한 게임의 진화계보와 엄연히 별도로 독자적으로 진화해왔다는 것을 비행시뮬레이션의 화석들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비행시뮬레이션은 게임이 아니다! 물론 인생은 하나의 게임이다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비행시뮬레이션도 게임이다. 그렇지만, 흔한 개념으로서 킬링타임용의 컴퓨터 오락을 게임이라고 말한다면, 비행시뮬레이션은 그 테두리에서 적어도 한쪽 발은 벗어나있다.   

석기시대           

 저 먼 각종 자료들에서, 필자는 F-15 I이라는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이른바 비행시뮬레이션의 가장 오래된 화석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CGA 그래픽을 사용하는 1986년작인 이 F-15 I은 MPS의 유명한 디자이너 시드 마이어의 작품이며, 85년도에 8비트 애플용으로 나왔다가 큰 성공에 힘입어 PC용으로 이식되었다. 놀랍게도(당시로서는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겠지만) 이것은 한 개의 EXE화일로 만들어져 있다. 그 내용이야 어떻든 F-15 I은 F-15 II, F-15 III로 이어지는 계보의 시조로서, 비행시뮬레이션의 뿌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 계보를 만들어낸 Microprose사가 오늘날 비행시뮬레이션계에서 가장 인지도와 사실성 뛰어난 비행시뮬레이션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우연이 아닐런지도 모른다.


F-15 I

 또다른 희귀한 화석으로, 지금은 스타워즈시리즈에 전념하고 있는 루카스필름의 최초 비행시뮬레이션인 battle hawk 1942이 있다. 이는 1942년경의 태평양 전투를 다룬 것이다. 이 제품은 1988년작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Battlehawk 1942

 당시 점차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비행시뮬레이션이라고 한다면 대표적인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F-19나 팰콘1.0을 꼽는다. 지금 기준으로 돌이켜본다면 그것들이 정말 제대로 된 시뮬레이션이며 하다못해 게임성이라도 가지고 있었는가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로서는 나름대로의 사실성을 추구하며 비행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 어째서 게임과 다르다 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던 작품들이라 생각한다. 지금은 비행시뮬레이션을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어서 비행시뮬레이션을 그저 그래픽 멋진 3차원 슈팅게임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이 경우 플레이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 그때당시에만 해도 PC 비행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을 접한다는 자체가 비행이나 군사쪽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경력이 오랜 사이버파일롯들일수록 비행시뮬레이션에 대한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애당초 그만큼 비행시뮬레이션을 더욱 진지하게 접할 자세로 비행에 임해왔던 것이다.

 
F-19와 박스 아트

 F-15 II나 F-19, F-117등은 비슷한 계보를 가진 MPS의 작품으로서 망사로된 스모크와 삼각형 색종이 조각 파편등은 지금 생각해도 다소의 유머러스함을 느낄 정도이지만, 이 전형적인 비행시뮬레이션의 트레이드 마크는 폴리곤 시절이 끝나고 텍스쳐 맵핑이 실용화될 때 까지도 무슨 이유인지 계속 몇 개 회사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F-117 (로고)

 약간은 비행시뮬레이션계에서 이단아격인 루카스 필름의 초창기 비행시뮬레이션 시리즈를 또다시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루카스 아츠의 최초작품인 Battle hawk 1942는 후속작인 Battle of Britain(국내 출시명 최상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이 그래픽은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많은 시뮬레이션들이 초창기부터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나마 3차원 형태의 묘사를 하려한데 반하여, 전작에서 이어지는 최상의 시간은 비행물체를 순전히 2D 조각으로 그려놓았다. 즉 일정 각도에서 보는 항공기의 모습들을 일일이 따로 그려서 그 각도에 맞는 그림조각을 그 자리에 붙여주었던 것이다. 폴리곤 없는 가변 2D텍스쳐라고나 할까. 이런 방식은 제한된 여건하에서는 항공기 디테일을 살릴 수 있기 때문에 장점도 있지만 기체 형태 자체의 왜곡이 너무 심하여 다른 제작사들에서는 거의 채택하지 않은 방식이다. 그럼에두 불구하고 무슨 심뽀인지 루카스필름은 이 방식을 3째 작품인 Secret weapons of Luftwaffe(국내 출시명 나찌공군의 비밀무기)에도 그대로 적용하였다. 물론 이것이 이유는 아니겠지만, SWOTL로 불리우는 나찌공군의 비밀무기는 국내판의 충실한 스프링 매뉴얼과 함께 국내외에서 비교적 좋은 호응을 얻었는데 아마도 초창기로서는 획기적인 독일 비밀무기등을 묘사한 것이 상업적인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SWOTL은 내용면에서는 자기 부대의 조종사 인적관리를 아기자기하게 할 수 있어서 그점에 대한 평판이 특히 좋았다고 볼 수 있는데, 즉 부대장인 플레이어가 특정한 AI의 이름을 지어주고 전투에 참가시키면 그 AI 조종사가 경력과 전과에 따라서 그 비행능력이 높아진다는 당시로서는 매우 참신한 발상이었다. 이 방식은 나중에 스타워즈 시리즈에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지금의 그것과는 약간 다른 이유와 기술력에서 출발했겠지만, 현재의 3D콕핏 개념과 흡사한 회전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이 시야방법은 순전히 수동(手動)적인 것이고 기체의 실루엣이 나타나지 않는등의 이유로 실용적인 효과는 제한적이었지만, 개념 자체는 당시 기술력 한계를 한발 앞서나갈 정도로 새로운 것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잘 알수 없으나, SWOTL의 나름대로의 성공을 뒤로하고 루카스 필름은 더 이상 실제를 바탕으로 한 비행시뮬레이션 제작을 중단하고 SF인 스타워즈 시리즈의 제작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조지 루카스의 회사니까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게임으로서의 완성도나 영화를 등에 업은 흥행은 가히 지구를 뒤흔들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SF물은 전통적인 비행시뮬레이션의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 자세한 언급은 피하겠다. 루카스 필름이 계속 실제를 바탕으로 한 비행시뮬레이션을 만들었더라도 스타워즈 시리즈의 퀄리티로 볼때는 멀티미디어적으로 상당히 앞서나가는 제품을 출시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나름대로 돈 잘벌고 상업적으로 성공했으니 그들로서는 잘된 결정을 한 셈이다.     


최상의 시간


나찌공군의 비밀 무기(박스 아트)

 참고로 이때 당시의 비행시뮬레이션들은 지금은 거의 공개로 풀렸기 때문에 약간의 노력만 있으면 합법적으로 공짜로 구할 수 있다.

청동기 시대

 286 컴퓨터와 VGA 그래픽은 비행시뮬레이션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다른 장르의 게임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특히나 비행시뮬레이션은 연산에만 많은 시스템의 능력이 소비되고 비행기가 3차원상에서 움직임으로 인하여 그 공간을 충실하게 묘사해주느냐에 역시 많은 비중이 두어지는데, VGA 그래픽이 되어서야 이것이 비행기이고 저것이 자동차이고 하는 것을 그런대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비로소 어느정도 사실감 있는 그래픽 시현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비록 극단순화된 상자곽인 폴리곤 그래픽이 주종이긴 하였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가장 처음 접했던 것이 다이나믹스의 A-10 1.5인데, 당시에 매우 획기적인 그래픽의 발전으로 알려졌으며 실사를 캡춰한 브리핑 화면등은 가히 감동의 도가니였다. A-10으로 지상공격을 하다 지겨워져 A-10으로 R/C 비행기에서 주워들은 각종 공중기동을 시도해보거나 미그기와 공중전을 벌이겠다고 난리 부스르를 추기도 했었다.


Dynamix의 A-10 1.5

아마도 VGA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은 이 A-10을 제작한 다이나믹스사가 아닐까 싶다. 다이나믹스사는 A-10 이외에도 레드바론(국내 출시명 "하늘의 영웅들"), 태평양의 에이스등 깔끔하면서도 주요 임무를 수행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그래픽, 흥미진진한 몰입성등을 가진 연작의 흥행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레드바론은 말그대로 1차대전 당시의 하늘의 기사들간의 전쟁을 묘사한 수작으로서 두꺼운 정품 매뉴얼에 힘입은 경력비행의 감정이입이 대단히 잘된 작품이었다. 그래픽 또한 제한된 여건에서 매우 효과적인 묘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작품은 나중에 레드바론 II로까지 이어졌다. 여담이지만, 비행기에 개인 무늬를 그려넣고 경력 비행 중 적국의 조종사들끼리 결투 신청 쪽지를 보내는 것까지 묘사한 이 작품이 그 대단한 성공에 힘입어 이후의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들의 공중전에 대한 약간은 지나치게 낭만적인 감정을 낳았던게 아닌가 싶다. 사실 공중전을 스포츠나 기사들간의 마상창시합과 비교하면, 아돌프 갈란트의 인터뷰를 비롯해 경력있는 전현직 조종사들은 펄쩍 뛴다고 한다. 결국은 공중전이라는 것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죽이고 내가 사는 전쟁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만 낙하산을 쏘지 않는다거나 기타 그와 유사한 조금은 낭만적인 일화나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닌 불문율등은 존재했었다고 한다.


레드 바론 (로고)

레드바론 II 3D

 태평양의 에이스는 2차대전 태평양전선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서, 항공모함 전투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영화 도라도라도라에 익숙해져있던 국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태평양의 에이스는 친숙하게 받아들여졌고 세계적으로도 흥행에 성공했다.     


태평양의 에이스

 또한 유럽의 에이스는 수많은 세계의 프로그래머들이 패치격인 각종 유틸리티들을 다수 만들어내어 에이스 시리즈에 대한 열렬한 애착과 관심을 증명해보이기도 했다. 에이스 시리즈의 수명은 각각 꽤 길었던 편이다. 외국 어떤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의 홈페이지에는 에이스 시리즈에 "내가 커오면서 삶의 많은 시간을 여기에 투자했다" 라고 자랑스럽게 주석을 달고 있기도 한데, 필자역시 마찬가지로서 두세 번의 방학을 전혀 피서나 외출 없이 아침부터 새벽까지 에이스 시리즈에만 몰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유럽의 에이스

 이 시절의 다이나믹스 흥행연작들은 나중에 에이스 모음집으로 CD에 담아질 만큼 그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방대한 분량의 역사적 배경 설명 및 전술이 포함된 매뉴얼(유럽의 에이스를 제외하면 국내출시판에서 완역되었음)등은 비행시뮬레이션의 리얼리티를 한층 배가시켜주는 데 일조를 했고 오늘날 매뉴얼의 충실성 여부에 따라 구매의사에 변화가 있다고 할 정도로 매뉴얼은 비행시뮬레이션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부분으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국내의 모 수입사에서 비행시뮬레이션에는 필수불가결한 매뉴얼의 배경 설명 부분을 임의로 삭제하여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들에게 악덕기업으로 비난받기 전까지, 어떤 사람들은 매뉴얼 때문에 비행시뮬레이션을 소장품으로 구입하기도 하였고(이건 요즘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박스의 크기와 무게를 보고 무조건 구입하는 일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낭만적이었던 시절이 아닌가 싶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이때 당시의 EA의 제품으로 척 예거의 공중전이 있다. EA사는 척예거의 공중전 발매 당시 이미 LHX등 비행시뮬레이션 계통에서 나름대로 위치를 가지고 있던 회사인데, 척예거의 공중전은 이러한 입지를 확고히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척예거의 공중전은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태평양의 에이스 정도의 제품이고 단지 2차대전, 한국전, 월남전의 시대별 항공기가 등장하고 뒤섞여 전투를 벌여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인 점을 제외하면 일견 그저 평범해보이는 제품이지만, 실상 그 존재가치는 뛰어나다. 완성도가 중요시되는 비행시뮬레이션 중에서도 재미나 상업적 성공이 아닌 존재가치로 평가되는 비행시뮬레이션은 사실 손꼽을 정도인데, 척예거의 공중전은 그러한 손꼽히는 명작들중 하나이다. 어떤 이의 말을 빌면 척예거의 공중전은 비행시뮬레이션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바로 이런 것이 비행시뮬레이션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적당한 것중 하나이다. 즉 그자체 비행시뮬레이션의 개념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캠페인 모드가 없이 단일임무와 간단한 미션제작기만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차원상의 전투상황을 이해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 제품의 가치는 게임이라는 것 자체를 그다지 적극적으로 소개 하지 않던 90년대 초반의 국내 언론에서조차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한번쯤 해볼만한 잘된 작품이라고 소개되었다는데서도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불과 며칠전에 있었던 컴뱃심의 설문조사에서 주로 하는 시뮬레이션의 목록 상위에 바로 이 척예거의 공중전이 랭크되었다는 사실이다. 외국에서는 시뮬레이션의 생명력이 우리나라처럼 유행에 좌우되는 면이 더 적다고 할수도 있지만 그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분명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아래 말씀드릴 팰콘3.0도 나온지 5년이 훨씬 넘는 시점에서 동일한 설문조사에 상위를 차지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수백년이 지나도 명작이듯이 명품은 얼마가 지나도 명품인 것이다. 바로 이런 시대와 유행에 구애받지 않는 명작들을 우리는 고전이라고 부른다. 훌륭한 고전인 척예거의 공중전은 이후 작품인 USNF 시리즈에 기본골격이 그대로 유지되어 전해졌다.       


척 예거의 공중전

 비록 286시스템에 최적화되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저 유명한 스펙트럼 홀로바이트 사의 팰콘3.0을 빼놓을 수가 없다. 팰콘3.0은 농업혁명과 마찬가지로 가히 혁명적인 제품이다. 부분적인 면에서 그동안 팰콘3.0과 비슷한 재미나 난이도를 주는 것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팰콘3.0은 당대의 기술을 모두 집약하고 앞으로의 비행시뮬레이션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준 작품이었으며, 이후 수 년간 최고의 비행시뮬레이션 자리 유지는 물론 90년대 중후반까지도 그를 즐기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한 완성도를 위해서 286으로는 무리였는지, 286이 보편적인 상황에서 386에 연산용 코프로세서(이때 이정도 사양이면 재벌 아들이나 가질 수 있는 것이었음)를 탑재해야만 최고의 비행 사실성과 그래픽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으니 팰콘3.0이 얼마나 앞을 내다보고 만들어진 것인지 짐작할만 하다. 팰콘3.0은 비행시뮬레이션을 단지 대충 조작법 익혀서 적기 죽이고 다니는 것으로부터 실제 기체조작과 매우 흡사한 조작방법과 전술을 이해하고 전쟁속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임무를 파악해야 하는 전문적인 취미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두꺼운 매뉴얼은 단지 감정이입을 위한 역사책이 아니라 시뮬레이션을 조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실용적 이유에 의해서 역시 두꺼워야만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다. 모뎀란게 대체 뭣이여? 라고 할만한 시절, 인터넷은 커녕 국내 업체의 VT기반 BBS도 일부의 매니아적 취미쯤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시절에, 팰콘 3.0은 이미 모뎀 및 네트워크 플레이 메뉴를 지원하고 있었고 그것도 단순한 대결모드만이 아닌 캠페인에 동참하는 기능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당시에 2400모뎀으로 팰콘3.0의 모뎀플레이를 즐긴 사람들이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네트워크 플레이를 한 사람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팰콘 3.0

 팰콘3.0의 새로운 개념은 또있다. 동일한 엔진을 사용한 호넷과 미그29를 연달아 출시함으로써 각각의 기종들을 동일한 네트워크상에 올려놓고 비행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한 시뮬레이션에서 여러 대의 항공기를 표현한 예는 전부터 있었지만, 그 경우 각각의 항공기 묘사의 디테일함은 다소 생략될 수밖에 없다. 물론 팰콘 패밀리인 호넷이나 미그29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디테일한 면이 생략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감을 주려 한 흔적이 보이고 독자적인 패키지들을 한 네트워크에 올릴 수 있다는 발상 자체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요즘에야 노바로직이나 엑스윙 시리즈등을 비롯 이런 식의 묶음이 심심치 않게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 팰콘패밀리에는 원래 A-10이나 다른 많은 장비들을 포함시켜 말그대로 통합전장을 실현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PC 시스템이 너무나 빨리 발전해버리는 바람에 그 계획히 가시화 되기도 전에 팰콘엔진이 시스템에 비해 낙후된 것이 되어 더 이상의 패밀리 출시는 않고 팰콘4.0의 제작으로 들어가버렸다. 이 팰콘 패밀리 3형제는 후에 미공군 F-16 교관의 70분짜리 공중전 강연 동영상 및 강의교재를 포함하여 팰콘골드라는 CD버젼으로 나왔는데 이 소장품(게임이라기보다는)은 PC 비행시뮬레이션 역사상 가장 가치있는 소장품중의 하나이다.   

 이 팰콘3.0의 수명이 얼마나 길었는가 하면, 필자가 팰콘3.0을 사고난후 군대에 갔다 와서 모 통신동호회의 팰콘3.0 네트워크 플레이 대회(그때당시는 게임방이라는 것도 없었고 멀티방이라는 게임방의 전단계 개념이 서울시내 몇군데에서 어렵사리 운영해나가던 시절이라 대회도 어떤 회사 사무실에서 했음)에 참가했을 정도였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팰콘 4.0이 나온 후에도 팰콘4.0을 돌릴만한 시스템이 되지 않는 사람은 팰콘3.0을 지금도 구하고 인스톨해서 플레이한다는 소문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팰콘3.0의 생명력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팰콘 3.0의 가장 중요한 혁명적인 아이디어로서 패드락 모드의 도입을 들 수 있다. 그 이전에는 고장된 각도를 보여주는 고정조망만이 조종석에서의 유일한 외부 관찰방법이었으나, 이는 시야각도 왜곡의 소지도 있고 전투중에는 전방 계기판보다는 적기에 시야를 고정시키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모니터 중앙에 적기를 고정시키고 조종석이 움직이게 만든 패드락 모드는 비행시뮬레이션의 기술적 발전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가 천동설에서 지동설을 받아들이게 된 만큼의 시점의 변화라고나 할까. 팰콘3.0에서의 패드락 모드는 약간의 문제점이 지적되긴 했지만 그이후 특수한 혹은 고집적인 몇몇 경우를 제외한 거의 모든 비행시뮬레이션들이 패드락 모드를 도입할 정도로 패드락 모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지금도 패드락 모드에 대한 찬반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고 이제는 더 나아가 아예 3D 화면상에서 조종석 계기를 읽고 실제 조종사와 같은 방식으로 시야를 움직일 수 있는 3D조종석이라는 개념으로 발전되고 있다. 이 팰콘3.0은 완성도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이후 다른 모든 비행시뮬레이션은 이 팰콘3.0을 대상으로 벤치마킹 되면서 제작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비행시뮬레이션계로서는 대단한 다행이다. 즉 MPS는 그들이 원하는 바대로 비행시뮬레이션의 앞날을 제시하는데 실제로 성공했다. 어쩌면 팰콘3.0이 실패했다면 최악의 경우 하드코어 비행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 상업적 흥행소지가 없는 것으로 업체들에게 인식되고 이후에는 마치 워게임이 전략게임이라는 단순파괴게임으로 전락했듯이 비행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 오락적인 면만 강조된 실질적인 3차원 슈팅게임화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팰콘3.0의 성공 이후에도 아케이드성을 강조한 몇몇 회사의 이른바 비행시뮬레이션들이 상업적으로는 흥행을 하고 있는 현재의 처지를 감안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철기 시대

 컴퓨터가 386, 486으로 넘어가면서 업체들은 상자곽들끼리의 전쟁이 아닌 보다 리얼한 그래픽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바로 텍스쳐 맵핑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텍스쳐 맵핑은 간단하게 말해서 직선에 의해 이루어진 일종의 입체도형인 폴리곤 물체의 표면에 벽지를 바른 것이다. 지금은 3D 가속에 힘입어 각종 광원효과들까지 묘사되지만 밋밋한 상자곽들을 전차나 비행기라고 "가정하고" 시뮬레이션을 즐기던 당시에 실제와 비슷한 피부가 덧씌워졌으니 당시의 시각적인 놀라움은 3D카드가 처음 나왔을 때 만큼이나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필자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시뮬레이션의 완성도면에서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면에서는 기술력의 한계 때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개념상 도리어 전작에 못미치는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그래픽의 진보와 완성도의 후퇴, 이것이 가져오는 결과가 무엇이었을까. 두 가지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오리진에서는 용병비행단을 소재로한 스트라이크 코맨더를 내놓았다. 지금은 3D동영상이 들어갈만한 스토리 동영상에 2D만화를 집어넣었고 스토리라인에 의한 전개등등 비행시뮬레이션으로서는 참신한 발상과 외적인 화려함이 갖추어진 제품이었다. 초기에는 상당한 호응을 얻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스토리라인 방식 진행의 한계란 한번 깨고나면 또 하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든다는 것이다. 스트라이크 코맨더의 생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불과 수 개월밖에 주요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는 일반 게임들과 달리 에이스 시리즈나 팰콘3.0등의 전통적인 비행시뮬레이션들이 수 년씩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데서 볼 수 있듯이 비행시뮬레이션은 그 생명력이 긴 것을 특징으로 하는데, 화려함으로 무장하고 초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스트라이크 코맨더의 생명이 비교적 짧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스트라이크 코맨더는 시뮬레이션의 형식은 취했지만 이미 팰콘3.0의 사실성에 익숙해져버린 유저들에게는 같은 F-16을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현실적인 무장과 비행모델등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져 그리 좋지 못하게 평가되었다. 그리고 마치 전투비행은 수단일 뿐이고 엔딩보기가 주목적이라는 듯한 단일 스토리라인이라는 형식이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들의 정서와 맞지 않는 면이 있었다. 단일 스토리라인에서 엔딩을 보자면 죽었을 때 리셋을 하거나 에디트를 해야 되는데 그러면 이미 그건 비행시뮬레이션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당시 약간의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는지 어떤지는 알 길이 없지만, 5.25인치 플로피 디스켓 시절에 무려 40메가를 넘어가는 하드 용량을 차지할 정도의 초호화판(왜냐하면 그 용량 대부분이 스토리 만화와 사운드였다) 제품이었지만 지금 시점 에서 스트라이크 코맨더를 시뮬레이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아니, 그런 것이 있었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도 꽤 된다. 여하튼간에 평판은 시간이 갈수록 나빠졌지만 상업적 성공은 했는지 오리진은 퍼시픽 스트라이크와 윙즈 오브 글로리라는 리얼리티는 약간 떨어지고 RPG성이 가미된 독특한 종류의 제품을 몇 개 출시했다.

 MPS에서는 F-15 II의 후속작으로 텍스쳐 그래픽으로 무장한 F-15 III를 출시했다. 외견상 F-15III는 팰콘3.0과 유사한 점이 많았는데 리얼리티 뛰어난 전자장비(사실 전자장비면에서는 F-15 III나 제인스 F-15나 그 표현방법, 난이도, 조작기능등이 거의 같다), 다소 거칠고 어둡지만 현실감 있는 그래픽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모뎀플레이도 지원했다. 반면 커리어 모드에서 조종사는 아군의 지원도 없이 단독으로 수백 마일 적진에 침투하여 임무를 성공하고 돌아와야 하는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소위 "람보 미션"으로서 많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수 년전부터 비행시뮬레이션의 전투에서 아군들의 등장과 협조는 이미 당연한 것이 되어있었는데 이 단점 하나 때문에 이 제품에 쏟아부은 많은 제작비를 날려먹었다는 소문이 전해진다. 더욱이 F-15 III는 걸프전 캠페인도 포함하여 걸프전 특수까지 노린 제품이었는데 말이다. 이런 이해안가는 실수를 했던 이유는 아직도 미지수다.


F-15 III

 스트라이크 코맨더와 F-15III의 두가지 예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혀 다른 엔진을 돌리는 전혀 다른 비행시뮬레이션이라도, 매니아들은 항상 동일한 기준에 입각해서 평가를 한다. 비행시뮬레이션이 실제 환경을 똑같이 묘사하지는 못하지만, 어느정도 이루어진 기존의 완성도 있는 작품은 항상 비교대상이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들은 다른 시뮬레이션을 접할때 마다 "앞으로의 얼마간의 시간을 죽여줄 새로운 게임을 구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뮬레이션이든지 기본적으로 같은 세상인데 단지 "다른 기종의 항공기에 탑승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감안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두 제품 모두 팰콘3.0의 경쟁상대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팰콘3.0이 매니아들의 눈을 높여놓지만 않았더라면 그자체로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을만 한 작품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1등 이외에는 모두가 패자일 수밖에 없는 냉엄한 현실에서 팰콘3.0의 이후에 출시된 두 제품은 팰콘3.0의 그늘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여하튼, 스트라이크 코맨더는 그자체가 워낙 상업성이 짙은 제품이라 논외로 치더라도, F-15 III는 팰콘3.0을 제외한다면 나름대로 매우 뛰어난 그래픽과 사실성(팰콘3.0보다 그래픽은 훨씬 뛰어남)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시뮬레이션에서 제공했던 환경중에서 단 한가지 요소인 윙맨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사장되고 말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행시뮬레이션의 궁극적인 평가기준은 그래픽 여부가 아니라 완성도에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픽도 완성도에 일조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정도 수준만 충족되면 그 이상은 단순한 시야만족일 뿐인데 비행시뮬레이션의 수명은 비교적 길고 그 전에 더좋은 그래픽이 선보여질 여지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그래픽에 주로 의존한 흥행작들은 그 수명이 더 좋은 그래픽이 나오기 전까지만으로 제한되곤 하는 것이다.

 F-15 III와 같은 회사의 제품이고 매우 비슷한(즉 기종만 다른 셈인) F-14 플릿 디펜더는 이당시의 성공한 제품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F-15 III에서 이미 전자장비의 묘사에 대한 노하우는 쌓여진 것처럼 보이는데, MPS는 이점을 F-14 라는 기종에서 다시 최대한 살렸다. F-14는 주로 레이다를 통해 적을 요격하는 함대방공 요격기인 것이다.

 F-14 플릿 디펜더는 F-15 III에서 지적되었던 람보미션에서 벗어나 아군 편대원들을 효과적으로 명령하고 협조할 수 있는 명령어들을 추가하였고 결국 F-14 플릿디펜더는 AI가 다소 비현실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지적을 받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완성도 높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팰콘 3.0 이후에는 실로 극단적인 완성도를 추구하는 "하드코어(극단적인 형태를 원하는 소수 매니아의 취향을 충족시킨다는 뜻임) 시뮬레이션"만이 살아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가지 필자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점은 어째서 이미 전작인 F-15 III에서 삽입된 모뎀플레이 기능을 삽입하지 않았는가이다.


F-14 플릿 디펜더 (박스 아트)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MPS의 후속작품은 다름아닌 1942 PAW이다. 그래픽적인 완성도는 전작들과 흡사하나 2차대전의 태평양상에서의 프로펠러기를 다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제트기가 아닌 프로펠러기이므로 레이다 조작할 일은 없지만 속도가 바뀜에 따라 트림조작을 해주어야 하는 등 플라이트 시뮬레이터와 비견될만한 비행모델은 더 이상 사실적인 비행모델이 민간항공 시뮬레이션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민간항공 시뮬레이션을 즐기는 사람들은 전투비행 시뮬레이션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행모델의 간략화나 항법장비의 묘사부족 등의 이유로 상당히 멸시하는 태도를 취해왔던게 사실이다. 옛날의 에이스 시리즈는 박진감은 넘쳤지만 비행모델은 상당한 문제점이 제기되었던 바 있지만, 이후의 전투비행시뮬레이션들은 대부분 비행모델에 있어서도 뛰어난 완성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는 물론 전투상황 묘사와 비행모델연산 동시작업을 위한 시스템의 한계가 점차 극복되어가면서 가능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1942 PAW에서는 조종사 경력모드, 캠페인모드등 다양한 종류의 메뉴를 지원하며 그중에서도 캠페인 모드에서는 한 작전지역에서의 수개 함대를 직접 지휘하고 항공기운용을 결정하는 전략게임적인 면까지 포함한 매우 참신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사실 이것은 MPS의 해전 시뮬레이션인 Task force 1942 (국내출시명 무적함대)에서 이미 시도되었던 것이며, 이중 전략 인터페이스 부분은 TF1942의 것을 거의 그대로 얹었다.
 매우 호평 받았고 매니아층도 많이 얻은 잘된 작품이나, 아쉽게도 메뉴에서 지원한 모뎀플레이 기능이 매우 불안정해서 접속이 거의 불가능한 단점이 있었다. 이것만 제대로 되었더라도 훨씬 더 많은 매니아를 오래 붙잡을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1942 Pasific Air War(박스아트) 

철기 시대

 철기시대의 키워드는 뭐니뭐니 해도 모뎀을 포함한 "네트워크"이다. 철이 발견된 것은 오래 전이지만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비로소 철제품들이 전세계를 뒤덮게 되었듯이, 네트워크라는 기능의 실용화가 비행시뮬레이션계에 있어서 산업혁명과도 같이 작용한 것이다. 이러한 네트워크 기능 향상에 있어서 PC가 도스체제에서 윈도우즈 체제로 바뀐 것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 도스에서는 직접 전화로 오픈된 게임에 접속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뎀연결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인터넷 접속은 그야말로 난해한 문제였다. 그러나 윈도우즈 운영체계가 보편화되면서 전화접속 및 인터넷 접속이 보다 쉬워졌고 그결과가 시뮬레이션의 네트워크 기능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F-14 플릿디펜더, 1942 PAW등이 많은 호평은 받았지만 "나혼자"라는 한계를 보였다면, 모뎀플레이 기능이 본격적으로 쓰일 수 있게 된 후부터는 다소 비행모델이나 완성도에 한계가 있는 시뮬레이션이라 할지라도 모뎀플레이 기능만 잘되면 모뎀을 이용해 서로 대전하는 도구로서 훌륭히 이용되곤 했다. 이 때문에 개인차는 있지만 전반적인 흥행작 추세는 비행모델과 레이더 조작이라는 전통적 개념이 그 기준에서 한발 물러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대략 이때쯤(즉 9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640*480 그래픽이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점도 빼놓을 수 없지만 그래픽은 위에 말했다시피 완성도 평가에 부분적인 것이므로 중요한 기술적 변동사항에 속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다만 전반적인 표현효과의 상승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그래픽과 모뎀기능 양자의 힘을 충분히 보여준 대표적인 제품은 EA사의 척예거의 공중전의 아들격인 USNF 시리즈이다. 초기에는 고해상도 그래픽과 박력있는 사운드로 매우 많은 호응을 얻었으나 그래픽은 그보다 좋은 것을 한두번만 보면 금새 그 의미가 퇴색되므로 그 호응 자체가 오래 갈수 없지만 뒤따르는 후속작들과 강력한 네트워크 플레이 기능으로 인하여 꾸준한 팬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비행모델에 한계가 있고 레이다가 간략화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성공은 특별한 것이다. 나중에는 엔진의 대폭적인 개선 없이 이름만 바꿔서 울궈먹는게 아니냐는 비판도 일었지만 파이터 앤솔로지라는 최종 울궈먹기판이 거센 항의에 직면할때조차도 그 제품은 전 세계에서 날개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USNF 97

 또하나 DID라는 회사의 꾸준한 제품 출시 결과 TFX 계열을 잇는 EF2000과 추가팩이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역시 완성도 면에서는 비행모델의 단순화, 무한대에 가까운 기총숫자등등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쉬운 조작과 네트워크 기능, 고해상도 그래픽으로 무장하고 마치 국내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 공식 넷플품목이라도 되는 듯이 날개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지금도 팔려나간다) 이 EF2000은 모 통신사 주최 대회와 제1회 공군주최 비행시뮬레이션 대회의 주기종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EF2000


F-22 ADF의 확장판인 Total Air War

 같은 회사의 후속작인 F-22 ADF도 전작과 거의 비슷한 내용의 답습에도 불구하고 네트워크 지원으로 역시 제2회 공군주최 시뮬레이션 대회 기종으로 채택되었다.

 네트워크 기능은 이렇게 강력한 것이다. 이점은 스타크래프트가 PC방 업계를 살렸다고 하는데서도 충분히 알 수 있으니, 그 영향력이란 비행시뮬레이션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사실은, 스타크래프트가 게임방에서 활발하게 플레이되기 훨씬 전부터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들 사이에서 모뎀플레이는 물론 PPP를 이용한 다중 네트워크 플레이도 이미 실용화되어 있었다. 단지 게임방 사정이나 비행시뮬레이션의 특성상 비행시뮬레이션을 게임방에서 즐기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비행시뮬레이션이 게임방을 "선점" 하지는 못했을 뿐이다.

 비행시뮬레이션 네트워크 기능은 이러한 전통적인 개인간 연결방식이나 공개 및 유료서버 이외에도 또하나의 개념을 제공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통합전장 계획이다. 통합전장 계획은 예전부터 DID가 공개적으로 언급한 시뮬레이션 네트워크기능의 일대 혁명적 발전이라 할 수 있는 개념인데, 이미 동일 엔진을 이용한 몇 개의 독자적인 패키지상품을 하나의 네트워크에 올릴 수 있는 기능은 종종 선보여왔으나 DID사의 계획은 그러한 기능을 공군무기는 물론 전차등의 지상무기까지로 확대하여 전장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무기들을 하나의 엔진에 통합하여 네트워크로 묶을수 있게 한다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것이다. 아직까지는 구체적인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이러한 통합전장개념은 네트워크 플레이의 표준이 될 가능성이 있으며 팰콘4.0에서도 동일 엔진을 이용한 추가 패키지의 출시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

 한동안 네트워크 기능이 중요시되면서 리얼리티를 배제한 제품들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곤 했다. 노바로직의 각종 비행시뮬레이션 시리즈등은 노바월드를 통해 수십명씩 플레이 할 수 있는 장점으로 인해 매우 비현실적인 사실성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팬을 확보하고 있다.

 리얼리티냐 대중성이냐의 문제는 비행시뮬레이션계의 전통적인 화두중 하나이지만, 90년대 중후반에 사실성이 많이 떨어지는 제품들이 네트워크기능에 힘입어 비행시뮬레이션계의 주류를 이루었다면 근래들어 그러한 추세가 다시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즉 네트워크 자체가 관심이던 것에서 네트워크는 단지 평범한 필수기능으로 인식되면서 다시금 비행시뮬레이션 자체의 본질적인 리얼리티에 대해서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검증받은 성공한 제품이 아니면 네트워크 기능이 있더라도 같이 플레이할 사람을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뮬레이션 자체의 완성도가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 리얼리티에 치중한 하드코어 시뮬레이션을 들어보자면 제트기로는 제인스 F-15E와 MPS의 팰콘4.0이 대표적이다. 간혹 호넷코리아를 들기도 하지만 호넷코리아는 비행모델에 치명적인 왜곡이 있다. 사실은 제인스 F-15E도 마찬가지지만. 필자 생각으로는 제인스 F-15E가 현재의 기준에 입각해서 만들어졌다면, 팰콘4.0은 팰콘3.0에서 그랬던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기준을 예상하고 만들어진 것 같다. 제인스 F-15가 더 먼저 나오긴 했지만 나름대로 성공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기술적 격차치고는 두 제품의 차이는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제인스 F-15


호넷 코리아

 팰콘4.0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개념이라기 보다는 3.0에서 기획되었던 아이디어들을 최신 기술에 맞추어 재구성 하였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3D 조종석, 동적 캠페인, 네트워크기능들은 3.0에서부터 존재했던 개념들이지만, 개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제작되어 있다. 출시 초기에는 많은 버그와 시스템 낭비로 인하여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다행히 약 반 년간에 걸친 패치 이후 1.07에서는 원래의 기능들이 제대로 무리없이 수행되는 것으로 보인다. 네트워크도 국내에서 8명까지 무리없이 성공하였다는 보고가 있는데 이정도면 공개서버가 아닌 이상은 충분한 접속기능이 될 수 있다. 해외에는 그이상 인원의 접속보고도 있다.

 팰콘4.0 역시 동일한 엔진을 이용한 다른 기종의 추가출시가 계획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미 팰콘4.0이 출시되기 전부터 동시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조만간에 미그29를 비롯하여 수 종의 패밀리들이 출시되어 제한적인 항공 통합 전투를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팰콘 4.0은 모든 면에서 현재 비교대상이 없으며 비교한다고 해도 다른 게임보다는 오히려 군사용 시뮬레이터에 비교되는 실정이다. 팰콘3.0때도 그랬지만, 팰콘 4.0 이후에 하드코어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들은 팰콘4.0보다 못한 완성도를 보이는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공산이 크다. 제작사들도 이점을 잘 인식하고 있을 것이며, 추후 제품들에 있어서 매니아들을 주 소비자로 삼는다면 팰콘4.0의 완성도를 감안해서 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적어도 부분적인 면에서만큼은 팰콘을 능가하는 작품을 내려 할 것이다. 결국 팰콘4.0은 3.0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수년간의 비행시뮬레이션 표준이 될 공산이 크다. 하드코어 비행시뮬레이션이라 하더라도 제작업체측에서는 상업성과 완성도의 기준을 잘 조절하여 어느정도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팰콘시리즈역시 그런 부분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업체에서라면 "이런것까지야..."라고 생각할만한 부분 혹은 아예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을 디테일하게 묘사함으로써 하드코어라는 단어의 기준을 훨씬 엄격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팰콘 4.0

 한편으로 최근의 프로펠러기 시뮬레이션 시장을 본다면 최근의 치열한 경쟁을 헤치고 결과적으로 여러 경쟁상대들 중에서 비교적 그래픽이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MPS의 유러피안 에어 워가 승기를 잡은 것 같다. 이로써 경쟁사였던 스펙트럼 홀로바이트와 합쳐진 MPS는 명실상부하게 비행시뮬레이션 계열의 최강자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게 되었다. 유러피언 에어 워를 비롯한 주로 프로펠러기인 몇몇 비행시뮬레이션들은 게임존이나 기타 공개 서버에서 서비스되고 있을 정도로 오늘날 비행시뮬레이션의 위치는 비록 상대적인 시장규모는 크지 않지만 일부 극소수 매니아만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유러피언 에어 워

 물론 이밖에도 많은 종류의 시뮬레이션이 있다. 그러나 지면관계상 일일이 다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이제까지 주요한 기술적 진보와 더불어 사실성과 완성도를 기준으로 비행시뮬레이션의 계보를 살펴보아왔다.  필자는 이러한 뛰어난 비행시뮬레이션들이 있는 세상에서 그들과 함께 주요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데에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비록 이제까지 비행시뮬레이션의 발전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완성도를 기준으로 논의를 해왔으나, 비행시뮬레이션의 큰 범위에는 그점에 반드시 충실하지 않은 계열도 다수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하드코어 시뮬레이션이라 할지라도 상업적인 이유와 PC의 한계 때문에 어느정도 선에서 사실성과 재미의 선을 맞추는 것이 현실이며, 심지어는 군사용 시뮬레이터라고 할지라도 비용문제 때문에 특별히 중점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 아니면 약간의 생략은 감수하기 마련이다. 결국 PC 비행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은 제작사의 상업적인 이익을 보장하는 한도 내에서 재미와 사실성의 영역한계를 정하게 되는데, 각 제작사마다 이 영역구분이 모두 같지는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회사라고 할지라도 어느 팀이 제작하느냐에 따라 그 완성도는 달라진다. 기술력의 문제가 없지는 않겠지만 최근의 비행시뮬레이션 제작사들은 나름대로 전통과 경력을 확보하였다고 보는게 타당하기 때문에 비행시뮬레이션의 노하우를 이미 가지고 있을 회사들이 완성도 낮은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순전히 상업적인 목적이라고 봐야 하겠다. 예를들면 팰콘3.0을 만든 스펙트럼 홀로바이트사가 영화 탑건을 소재로 한 인터렉티브 비행시뮬레이션인 "탑건"을 만들어낸 것을 들수 있는데, 탑건은 그래픽과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에 치중하고 비행사실성은 대체로 많이 간략화 된 제품이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팰콘4.0의 제작지연에 따르는 인건비를 충당하기 위해 출시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스펙트럼 홀로바이트사와 합친 MPS에서 그 속편격인 탑건 호넷 네스트를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비행시뮬레이션이라기 보다는 매크워리어의 그래픽 엔진을 사용한 실질적인 3D 비행슈팅게임에 가깝다.

 이렇게 상업성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제품만을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회사로 노바로직이 있다. 다른 회사의 비행시뮬레이션이 쥬라기 공원이라면 노바로직의 비행시뮬레이션은 고질라 정도로 비교하는게 좋을 것 같다. 비행 사실성은 최소한으로만 보증하고 노골적인 상업적 재미를 추구하는 회사인 것이다.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사실성의 단순화를 통한 쉬운 조작에 그치지 않고, 저사양에서도 돌아갈 수 있는 엔진을 이용함으로써 소비자층를 최대한 넓히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3D카드가 없이도 상당히 뛰어난 그래픽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만은 노바로직의 기술력이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골적인 상업적 정책은 많은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들로부터 매우 나쁜 평을 듣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상당수의 비행시뮬레이션 매니아들이 노바로직의 제품들은 비행시뮬레이션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으며 실제로 몇몇 비행시뮬레이션 동호회 게시판에는 노바로직의 제품에 대한 글쓰기가 금지되어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안좋은 평판이 상업적인 실패로 이어진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비행시뮬레이션 제작사라는 명분을 제외한 상품판매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 제품이 비행시뮬레이션이라고 인정받던 아니던 많이 팔리기만 하면 그만이므로 회사로서는 그런 비판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매우 나쁜 평판에도 불구하고 MiG-29, F-16, F-22를 대상으로 한 연작들을 잇달아 출시하고 있고 후에 이야기할 헬기시뮬레이션 쪽에서도 계속 제품을 내고 있다. 이러한 회사의 판매전략은 노바월드라는 공개서버로 이어져있고 이곳에서 위의 3가지 연작들이 통합전투를 벌일 수 있다. 그곳에서는 매일 수십명 이상의 게이머들이 미사일을 쏘면서 서로 전투를 벌인다. (비행시뮬레이션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노바로직의 다른 게임들도 노바월드 서비스를 제공한다)


노바로직 MiG-29


F-22 III

 한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이러한 노골적인 판매위주의 정책을 취하는 노바로직도 자사 제품을 홍보할때는 실제 조종사의 검증을 받은 리얼리티 뛰어난 제품이라고 홍보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광고용 언어유희에 불과하다. 이 회사는 사실 비행시뮬레이션 계보에서 언급 안해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본 기사의 성격상 언급하는게 좋을 것 같고, 또한 노바로직이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결국 비행시뮬레이션이라는 것도 상업적인 이익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점을 감안하면 완성도가 떨어지더라도 어느정도의 존재의의는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에 완성도의 극치를 달리는 비행시뮬레이션만이 반드시 존재해야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차원에서 비행시뮬레이션의 계보에 포함시켰다. 엄밀히 따지자면 MPS나 제인스로 대변될 수 있는 하드코어 시뮬레이션 계열 역시 저마다의 공략대상 소비자가 따로 있고, 그쪽 나름대로는 완성도를 충실히 해주어야 상업적인 판매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제작시 완성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구작 메뉴로  |  맨 위로  |  다음 페이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