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랙IR4나 프리트랙과 같은 6DoF 장비를 쓰면 전반적인 시야의 자유도는 향상됩니다. 그 대신 시야가 조종석 중심에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사격이 불안정해진다는 단점이 생기죠. 여기에 적응하기에 시간도 많이 걸리고요. 그때문에 6DoF 모드를 기피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어려움이 오히려 진짜 비행기에서의 거너리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짜 비행기는 시야 센터값같은게 있을리 없는, 말하자면 리얼 6DoF 그자체니까 말입니다.

전에 저희형이 아는 미국 친구가 본토에서 하는 공중전 체험 서비스를 타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롤만 돌려도 온몸이 조종석에서 이리저리 내팽개쳐지더라는 말을 하더군요. 물론 그친구는 신체적인 준비가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은 관광객으로서 비행기에 올라탔기에 전투기동에 적응하기가 더 힘들었겠지만, 어쨌든 그 친구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전투기 조종석은 비행기 기동이 조종사의 몸에도 영향을 미치는 장소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안전벨트를 조여매더라도 급격하게 G당기고 롤 돌리고 하면 게임에서처럼 자세가 꼿꼿이 고정될 수가 없겠죠. 그러면 건사이트를 보는 시선도 당연히 흔들릴 것이고요. 게다가 기동하는 적기에 리드를 잡고 쏜다는 것은 높은 G를 받으면서 건사이트를 통해 적기를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죠.

그래서 제트기의 HUD뿐만 아니라 오래된 2차대전 전투기들의 광학식 조준경도 머리 움직임으로 인한 오차를 보상할 수 있도록 반사식으로 되어있습니다. 건사이트 위치가 고정되어있다면 머리가 약간만 움직이더라도 조준선정렬이 안되기 때문에 조준 오차가 커지겠지만, 광학식 건사이트는 머리 위치가 움직이더라도 건사이트는 항상그 직전방에 보이도록 광학적으로 투영됩니다. IL-2의 6DoF모드나 Aces High의 건사이트를 보면 머리 위치를 움직이더라도 건사이트 좌표도 따라 움직여서 사격을 하면 탄환이 건사이트가 가리키는 지점으로 날아가죠. 그래서 광학식 건사이트가 건사이트 투영용 글라스 안에 보이는 한은 건사이트를 보면서 사격을 할 수 있습니다. 진짜 2차대전 비행기의 광학식 건사이트도 이를테면 그런 식이었습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하지요. 무려 2차대전때 그런 기술이 실용화되어있었다면, 그만큼 조종석에서의 머리움직임으로 인한 사격조준 정확성 문제가 항공전 역사의 비교적 초기부터 민감한 문제였음을 말해주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리얼 파일럿분들이 게이머들을 보고 자주 하는 얘기 중 하나가, 게이머들의 사격실력은 픽셀을 보고도 맞출 정도더라는 겁니다. 이게 90년대 중반에 천리안 블랙이글 포럼의 조종사와 함께하는 시뮬코너에서 게이머들과 모뎀플레이를 해본 리얼 파일럿분들이 처음 쓰셨던 말입니다. 지금은 이게 널리 퍼졌는지 그쪽에서 활동 안하던 다른 리얼 파일럿도 그런 표현을 쓰곤 하더군요. (그때는 640*480을 고해상도 모드라고 부르던 시절이었으니 전투기가 픽셀로 보인다는게 지금과 같은 차원은 물론 아닙니다.)

픽셀도 맞추는 그런 사격실력이 나올 수 있는 요인 중 중요한 한가지가 바로 이렇게 게이머들의 시선이 G도 안받고 흔들리지도 않으면서 건사이트에 정확히 고정되어있다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만큼 조준이 정교해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리얼 파일럿분들이 그만큼 더 그런 생소한 조건에서 나오는 사격실력을 더 생소해하는 것이기도 할테구요.

리얼 교범이나 실제 전투체험자들의 경험담같은 것을 봐도, 총잘쏘는 소총수가 멀리서 적을 맞추듯이 우수한 사격스킬로 멀리서 정교한 사격을 한다는 식의 개념이 공대공 사격에서는 아예 없습니다. 2차대전 비행기들에서는 더이상 빗나갈 수 없는 거리까지 최대한 가까이 가서 쏘라는게 거의 모든 에이스들의 조언입니다. 컴퓨터가 계산하는 정밀한 조준점을 제공하는 F-16에서도 표적을 피퍼에 놓고 정조준해서 쏘라고 하지 않고 적기의 기동평면 전방에 탄착군을 만들라고 하고 있죠. 두 경우 모두 정교한 사격술과는 거리가 있고, 공대공 기총 사격이 잘 맞지 않을 것을 전제로 그 오차범위를 상쇄하는 기술이 사격 테크닉에 들어가있는 셈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실제 세상의 조종사 뿐만 아니라 실제 공기속을 날아다니는 진짜 비행기 그자체도 CPU가 계산한 좌표를 따라 움직이는 시뮬에서의 비행기보다 훨씬 더 불안정하다는 점도 상당한 부가요인이 되겠죠.

제경우 IL-2 6DoF를 처음 접할 때는 시야가 더이상 고정되지 않고 움직이다보니 건사이트에 대한 불신이 생겨서, 전에는 별문제없이 정확하게 사격했을만한 평범한 순간에도 조준점을 못믿고 불안해지곤 했습니다. 뻔히 보이는 표적에 쏘는 것도 꽤 힘들게 느껴지고, 픽셀을 세어가면서 정교한 사격을 시도하기보다 난사를 하는 경향도 더 심해졌던 것 같고요. 그래서 이러한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사격을 하는 순간에는 시야 센터키를 누른다거나 6DoF를 disabled 시킨다고나 하는 편법이 필요했습니다. (반면, 시야가 자유로우면 적기를 트래킹할 때 머리 위치를 조금 높여서 기수 밑쪽을 더 넓게 볼 수 있는 이점도 생기는데, 6DoF에 익숙해지면 그상태로 사격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6DoF라고 해도 게임을 게임이 아닌 실제와 똑같이 만들어주는 궁극적인 수단이라고 할수는 없겠지요. 그것도 일장일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고, 게임에서는 각자 편할대로 하면 그만입니다. 다만, 6DoF 모드에서 거너리가 어려워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동안은 게이머로서 간과하기 쉬웠던 진짜 3차원 세상에서 날아다지는 비행기의 사격술 문제를 또다른 관점에서 간접적으로 접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