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력 발휘에 관계되는 모든 요소가 피아간에 거의 동등하게 작용하는 경우, 승패는 유형적 전투력의 절대치에 비례하게 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전투력은 유형, 무형의 각 요소의 상승효과로 나타나지만 무형적 요소, 다시 말해서 주로 부대(군대)의 정신력을 가지고서 유형적 요소, 즉 주로 물적 전투력의 부족을 보완하는 데는 명백히 한계가 있는 것이다. 환언하면 물적 전투력이 어떤 한도 이상으로 격차가 있을 때에는 정신력이나 기술을 가지고도 이 부족을 보완할 수 없는 것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전투력 발휘상 유형적 전투력의 절대성의 전리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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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정신의 원조 일본의 육상자위대 간부학교 교재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일본자위대는 정신력이 우수하면 물질전력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던 2차대전의 뼈저린 경험의 결과 이처럼 정신력으로 다른 조건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을 더이상 하지 않습니다.

사실 정신력이라고 해야 뭐 별거 없습니다. 고의적인 태업이나 군무이탈 수준이 아닌 다음에야 이기면 사기 충천하고 지면 바지에 오줌지리고... 어느 나라 군대나 다 비슷비슷합니다. 그리고 그런 부대 사기 관리는 리더십의 역할이 더 크지 전투원 개개인에게 책임을 돌릴 문제가 아닙니다. 전사들을 보면 악조건에서도 잘 버티면서 싸우는 군대는 정신무장 잘 된 군대가 아니고 전투 훈련을 제대로 받은 군대입니다. 지휘관들이 작전지휘를 멍청하게 하고 유형전투력이 압도적으로 열세한데 정신력 갖추라고 사병들을 갈군다고 해서 싸움에 이길 턱이 없죠. 무슨 염력으로 전투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희한하게도 사무라이 정신의 종주국 일본도 더이상 결정적인 승패 요소로 놓지 않는 정신력이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핵심적인 가치로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WBC 한일전 콜드게임패를 두고 정신력 부족이 패인이라는둥 하는 소리가 아직도 버젓이 나오니 말입니다. 승패는 병가지 상사고 패배는 언제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건 패배 그 자체가 아니라 패배에서 올바른 교훈을 얻고 다음에는 같은 패배를 반복하지 않는겁니다. 그러나 정신력이 가장 중요한 승패 요인이라는 얘기는 패배를 초래할 뿐 아니라 패배에서 올바른 교훈을 얻을 기회마저 박탈합니다. 정신력 부족이 어쩌고 하는 류의 허황된 비판들을 함부로 남발해서는 결코 안되는 이유지요.

인류에게 이성의 시대가 18세기부터 열리기 시작했는데 중세시대에나 통했을법한 정신력 어쩌구 하는 얘기를 21세기에 운운하는 꼴을 더는 안봤으면 합니다. 스포츠 얘기에서든 전쟁 얘기에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