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 비심갤에서 화두가 되었네요.
DC에 흔적남기고 싶진 않아서 그냥 이곳에 따로 제생각을 정리해봅니다. 마침 한 번쯤 정리해보고 싶었던 얘기라서요.

우선 조금 다른얘기지만 보병의 예로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보병 군장은 개별 품목들을 놓고 보면 시대가 갈수록 가벼워집니다.
그렇지만 보병 1인 휴대 군장의 총 무게는 줄어들지 않고 시대가 달라져도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병사 한 명이 가급적 많은 장비를 휴대할 수록 그만큼 야전에서 유용하고
따라서 개별 품목의 무게를 줄여서 남는 여유만큼 다른 장비를 더 들고 다니기 때문이죠.
그래서 1인 휴대 군장 무게는 궁극적으로 사람 한 명이 들고 활동할 수 있는 무게에 맞춰집니다.

전투기 조종석에서도 대략 비슷한 논리가 적용됩니다.

프롭 전투기는 비행기를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기총 쏘는데만도 조종사의 부담이 거의 최대치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비행 이외의 과업을 수행할 여유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기총 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해야 하는, 공대지 전문 조준장비를 갖춘 2차대전 경폭격기급 이상은
조종사 혼자서 임무 장비를 다 운용할 수 없기 때문에 폭격수, 항법사, 무전수 등 여러 명이 타서 역할을 분담해야 됐었죠.
조종 자체가 힘든 현대 공격헬기가 1인승이 거의 없고 대부분이 2인승으로 역할 분담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고요.

그런데 현대 제트기, 특히 FBW 기술이 적용된 이후 세대의 전투기들은 팰콘4.0 매뉴얼에서 피트 보나니도 말했듯이 비행 그자체는 무척
쉬워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트기 조종사가 프롭기 조종사보다 더 땅콩까먹고 놀면서 비행한다는 결론이 곧바로 나올 수 있는건 아닙니다.
비행조종 그 자체의 부담은 줄어든 대신, 그만큼 남는 여유에 다른 더 많은 작업을 수행하도록 한 명이 해야 할 역할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2차대전때는 2, 3인승 경폭격기가 했던 역할, 즉 정밀 항법이나 폭격장비, 무선장비 운용 등을 지금은 조종사 혼자 다 소화해야 되죠.

결국 어떤 사람 한 명이 받을 수 있는 스트레스의 총량은 인간적 한계로 인해 대략 일정하리라고 가정할 때
프롭기 조종사나 현대 제트기 조종사나 조종석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총량 역시 대체로 일정하다고 보면 됩니다.
전투 효율을 최대화하기 위해 조종사 한 명이 가급적 최대한의 허용 한계만큼 스트레스를 받도록 비행기를 설계하는게 가장 이상적이니까요.
만약 조종사가 인간적 한계치의 끝까지 가지 않고 편하게 임무 수행을 해도 되는 전투기가 있다면 그 비행기는 오히려 잘못 만든 비행기입니다.

즉 프롭기와 제트기 조종사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받는 과업 부담의 총량이 달라지는게 아니라,
조종석에서 해야 할 일이 서로 다를 뿐 스트레스의 총량은 인간적 한계로 인해 비슷합니다.

단 이런 점을 생각할 여지는 있습니다.
프롭 전투기는 해야 할 역할 자체가 한정되어있었기 때문에
조종사가 그 역할들을 익히는데 필요한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았습니다.
2차대전 당시 조종사 훈련 사정이 가장 여유로웠던 미군의 경우 100시간 좀 넘게 타고 일선에 나간걸로 알고 있고요.
극단적인 경우들에는 비행기 만져본 적도 없는 신참을 10시간정도 훈련 태우고 전투 내보내고 그랬죠.
반면 현대 제트기의 경우 다목적기로 발전하면서 맡아야 할 역할이 많다보니
그 역할들을 수행하는 방법을 하나하나 익히기 위해서 그만큼 시간 투자를 많이 해야 됩니다.
현재 우리나라 공군의 경우에 자대 가서 임무 적응훈련까지 마치면 중위 고참 되고 곧 대위 달죠.
전시에는 좀 더 속성 코스로 돌리겠지만 수행해야 할 역할의 종류 자체가 줄어드는건 아닙니다.

프롭기는 근접 개싸움을 잘해야 되는데 제트기는 미사일 뿜뿜하면 되니까 제트기 전투가 더 쉽다
이런 논리도 역시 성립할 수 없습니다. BVR전에도 그나름의 테크닉과 전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BVR이 현대전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현대 조종사 교육은 BFM에서부터 기본기를 갖추고
BVR로 나아가는 형태로 교육 테크를 탑니다. 그러니 현대 제트기 파일럿은 프롭기 파일럿보다 전투기동술은
떨어진다 이런 선입견은 잘못된 것입니다. 다만 임무를 수행하는 영역과 전투를 하는데 필요한 기술이
달라질 뿐입니다.

물론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진짜 조종사가 아니라 게이머의 입장에서라면 HUD 없이는 비행 못하고
전투기동 개념은 없이 미사일 발사버튼 누르는 법만 알고 게임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게임을 하는 사람의 문제지, 프롭기와 현대제트기라는 전투장비 고유의 내재적인 특성은 아닙니다.
그런 반쪽짜리 게이머는 제트기에만 있는게 아니라 프롭기에도 있고 나아가 카스나 서든같은데도 많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