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 TV 채널 서핑을 하고 있다 보니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헬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더군요. 장비에 대한 기술적인 내용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 장비를 운용하는 인원들에 촛점을 맞추어 진행하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101 공중강습 사단의 아파치 조종사들이 나왔는데, 보병과 똑같이 참호파고 위장하고 텐트에서 야영을 하더군요. 기지에서 하는 훈련보다 야전 훈련이 더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헬기 조종사라면 특권의식을 느낄법도 한데 그러한 야전 생활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참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아파치 승무원이 인터뷰를 할 때에도 전투의 승리는 M-16을 든 19살짜리 보병이 하는 것이고 자신들은 단지 그들을 돕는 일을 할 뿐이다라고 단정적인 어조로 말하더군요. 물론 현대전에서 그것은 상당한 과장이지만, 그런 태도는 여러 면에서 감명 깊었습니다.

우선 고가 장비를 다룬다고 해서 특권의식을 가지지 않고 다른 땅개들과 동등하게 야전 생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도 그렇고,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전투 조직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단호하게 설명하는 자신감 있는 태도가 꽤나 인상깊었습니다.



사실 배달의 기수 풍 인터뷰에서 흔히 나오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한몸 기꺼이 희생하고..."류의 얘기는 군에 입대할 때는 혹시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을지 몰라도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는 직접적인 동기는 될 수 없는 말장난에 불과하거든요. 그런 추상적인 얘기를 한다는 것은 도리어 그사람이 군인으로서 구체적인 정체성이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죠.그런 생각을 해야 훌륭한 군인이다라는 식으로 몰고가는 군 정신 교육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어쨌든 제가 느끼기에는 국가가 어떻고 민족이 어떻고 하는 현실성 없는 막연한 선전문구나 지껄이는 군인보다는 조직 속에서 프로로서 자신의 역할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군인이 더욱 믿음직스럽게 보이더군요.



제 직업이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말하는 것일지는 몰라도, 육해공군을 불문하고 계급과 상관 없이 직업 군인이라면 야전의 혹독한 생활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차대전시의 독일의 프랑스 침공 계획의 초안을 만든 독일 쉴리펜 원수는 참모와 함께 저녁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가 참모가 노을이 아름답다고 말하자 군사적으로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일 뿐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지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직업 군인이라고 봅니다. 야전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지내면서 자신의 임무를 자신있게 인터뷰하는 아파치 조종사는 슐리펜 원수와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지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류의 주장이 터무니 없는 또다른 이유는 군인들이 자신들의 궁핍한 생활을 응금슬쩍 국가 탓, 민족 탓, 국민 탓으로 돌린다는 겁니다. 자기들은 국민들을 위해 대신 희생한다고 은연중에 생색내는 거죠. 휴일 챙길 궁리나 하는 군인들에게서는 희생정신같은건 느껴지지도 않을 뿐더러, 군이라는 조직이 사회적으로 궂은 일을 대신 떠맡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희생에 대해 감사하고 말고는 민간인들의 몫이지, 군이 스스로 민간인들을 위해 희생하거나 목숨건다고 생색내거나 특권의식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위험성으로 따지면 총알 택시 운전사나 고속도로 트럭 운전기사도 엄청 위험성 높은 직업입니다.) 자원 봉사로 군생활 하는 것도 아니고, 월급 받고 밥값하려면 당연히 자기 직업에 전문가가 되어서 궂은 일도 마다않고 일해야 하는 것일 뿐이죠. 그걸 정 못견디겠으면 군소리 말고 다른 직업 구하면 되는거고요...



미국을 보면 부럽습니다. 미군 장비가 첨단 장비라서도 아니고, 국방예산이 커서도 아닙니다. 미군이라는 조직은 아까의 다큐멘터리에 나온 아파치 조종사에게서 보듯이 개개 장병들이 전문 직업인으로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 부럽고, 그러한 전문성 있는 정예 조직이 국민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