팰콘4.0에서 다이나믹 캠페인을 실용화한 뒤로 대세가 다이나믹 캠페인이 될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실제 전장과 비슷하게 돌아가는 다이나믹 캠페인을 만들기에 어떤 한계들(인적? 혹은 기술적?)이 작용하지 않는가 싶은데요. 그래서 아직은 패키지 게임을 즐기려면 싱글미션으로 이루어진 캠페인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처지입니다. 하지만 패키지 싱글 미션들을 하다보면 많은 경우 도대체 전장에 있는 것 같지 않은 느낌 때문에 좌절하게 되죠.
문득, 이런 싱글 미션의 한계가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서 정형화된 미션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싱글미션이 재미없는 이유가 정형화된 미션이기 때문이라면, 적어도 그 미션을 처음 할 때만큼은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대개 안그렇죠.
진짜 전쟁 중 발생할 수 있는 것같은 상황을 구성하는데 중점을 둔다면, 잘 만든 다이나믹 캠페인이나 싱글 미션이나 사실 그렇게 큰 차이가 없을겁니다. 이를 위해서는 미션디자이너가 해당 시대의 군사교리와 작전, 전술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실제 작전 구사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단지 "지상표적은 여기쯤 모아놓고, 적 에스코트기들은 언제쯤 출현시키고..." 이런 식으로 철저히 게임의 재미의 입장에서 미션을 짜게 되겠죠. 그러나 현실을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밀리터리 시뮬게임은 그게 오히려 현실성을 떨어뜨려서 재미를 반감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IL-2 게임엔진으로 만든 지상전 시뮬인 Theatre of War에서 그런 느낌을 특히 많이 받았는데요.
TOW의 캠페인 구성은 IL-2에서처럼 싱글미션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데, 미션 디자인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입니다. 기본적인 용병술에 따라 미션이 설계되어있지 않다는게 지상전이라 특히 더 심하게 느껴집니다. 어느 병력을 격파하면 여기서 적전차 몇대가 나오고... 이런 식으로 미션이 구성되어있는데, 새로 발생하는 상황에 대해 유닛 컨트롤만 가지고는 전혀 대응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상황이 전개됩니다. 그래서 게이머는 해당 미션의 첫판은 그냥 간만 보면서 적들이 언제 어디서 나오는지 외운 다음, 같은 미션을 리플레이하면서 앞으로 나올 적들에 대해 미리 대비해놓고 상황을 진행시키지 않으면 판수를 깨는게 아예 불가능하게 되어있습니다. 실시간 전략게임을 해본 분들이라면 아마 이런 플레이패턴이 매우 익숙하실겁니다. 이런 게임들은 "전투"를 한다기보다는 단순히 판수깨기 마우스 노가다가 되죠.
비행시뮬레이션도 미션디자인의 관점이 이런식이라면 진짜 전쟁터에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는게 당연할겁니다. F-16을 타고 MiG-21을 만났을 때 일선의 조종사라면 다른 조건은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에서의 대처만을 생각한다면 AIM-120으로 이 적기를 공격하는데 주저하지 않을겁니다. 그런데 만약 미션 디자인에서 5분 후에 Su-27이 나오기로 되어있다고 한다면, 게이머는 아마 그 싱글 미션 처음 했을 때는 십중팔구 Su-27한테 죽을겁니다. 실제라면 퇴각하겠지만 싱글미션 캠페인에서는 그러면 그 판을 깰 수 없을 것이므로 불리한 줄 알면서 요행을 바라고 싸우다 죽겠죠. 그리고 캠페인 다음 판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같은 미션을 리플레이하면서 이번에는 아까의 경험에 따라서 MiG-21을 사이드와인더로 잡고 AIM-120은 앞으로 나올 Su-27을 위해 아껴야만 할겁니다. 그렇다면 이런건 주어진 상황에서 가용한 정보를 토대로 결심을 하고 실제의 전략전술을 응용해서 싸우는 "전투"가 더이상 아니죠.
그래서 싱글 미션에서는 실제 전략전술을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미션디자이너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생각해본다면, 다이나믹 캠페인에서도 전장을 실시간으로 돌리는 기술적 문제를 넘어서 그 전장에서 병력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싸울지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역시 싱글미션을 디자인할 때와 마찬가지로 군사 실무 능력이 있는 디자이너가 필요합니다. 이런 군사지식이 뒷받침된 디자이너가 없다면 기술적으로는 다이나믹 캠페인을 만드는데 성공한다고 해도 플레이어가 현실감을 느끼면서 몰입할 정도로 그럴싸하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므로 패키지에 넣을 수 없을겁니다. 그리고 그 회사는 다이나믹 캠페인을 포기하고 싱글 미션으로 이루어진 캠페인을 넣겠죠. 하지만 다이나믹 캠페인을 디자인할 수 없어서 싱글미션을 넣었다면, 그 회사의 인적자원으로는 싱글미션도 역시 그럴싸하게 디자인해내기 힘들겁니다. 그러니 결국 다이나믹 캠페인을 구현하지 못하는 회사가 만든 패키지 게임에서는 대개 싱글미션 캠페인도 현장감과 동떨어진 판수깨기로 전락할 수밖에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서방측 밀리터리 게임에서는 실제 군출신이 미션 디자인에 참여한다는 것을 중요한 홍보포인트 중 하나로서 부각시키기도 합니다. 팰콘시리즈의 피트보나니라던가 브러더즈인암스의 앤탈 예비역 대령 등이 그런 대표적인 사례죠. 이 두 사람 모두 단순히 기술적 고증 자문의 수준을 넘어서 미션 디자이너의 역할을 했습니다. 반면 러시아 게임인 IL-2에서는 항공공학 분야 전공인 올레그씨가 전면에 나서있죠. 제생각으로는 그러한 차이가 게임의 전반적인 컨셉이나 느낌에 그대로 전해져있는 것 같습니다. 즉, 서방측 밀리터리 게임은 "전장"을 구현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반면 러시아 게임들은 "무기"를 구현하는데 중점을 두죠. 게임 디자인 관점과 취향의 차이기 때문에 우열을 평가할 수는 없는 문제지만, 제 취향으로는 아무래도 로맥의 장점을 찾아보려 기웃거려보다가도 결국 팰콘으로 회귀하게 되더군요.
제 자신의 게으름을 핑계대기전에, 다른 전투비행시물레이션게임에 손이 잘 가지 않는 이유는 여기 쥔장님과 같네요.
'전장'을 재현해줘서, 거기에 있다는 느낌으로, 생각해본 전술을 구사해보는 식의 게임진행을 위해서는 제가 아는 한 딱 한가지게임밖에 없더군요. 이거 능가하는거 언제나올까 기약없이 바라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