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고른 책은 아니고 우연찮게 얻게 되어 본 책인데요.
의외의 수확을 거둔 느낌입니다.
전장에서 병사의 적군 살해 행위의 현상과 그러한 살해 행위가 그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등에 관한 연구서인데요.
매우 많은 참전용사들의 증언들을 바탕으로 논의를 이끌어가고 있는데 매 페이지에 인용된 증언들 하나하나가 모두
그동안 여러가지 이유로 군 관련 컨텐츠들에서 비중을 두지 않던 최하위 각개 전투원의 전투행위의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2차대전까지 역사상 전장의 병사들 중 매우 소수만이 실제로 적에게 조준사격을 했다는 전제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데
영화 등의 간접체험물들, 심지어 밴드오브브러더스나 퍼시픽과 같은 호평받는 작품들에서조차도 크게 부각되지 않은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네요. 그런 부분들이 전투원들이 어떻게 싸우는가를 궁금해하는 제 취향과 많이 맞닿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민간인 호사가의 호기심을 위한 책은 아니고 궁극적으로 군사 실무자들이나 정책결정권자들에게 더 필요한 연구서입니다.
우리나라 군에서도 각개 전투원의 입장에서부터 초급장교, 교육훈련 담당자, 군 시스템을 만들고 관리하는 사람들, 그리고
군을 통수하는 정책결정권자들이 꼭 볼 만한 책이다 싶습니다. 미군에서 교재로 쓰이고 있는 책이라고 하네요.
저자는 심리학자로서 이 책을 썼지만 병에서부터 부사관을 거쳐 사관학교와 ROTC 교관을 역임한 예비역 중령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다루는 주제들에 대한 관점이나 수집한 증언들에 대한 해석이, 때로 군 시스템에 대해서 굉장히 무책임한 주장을 하기도 하는
민간 학자들과는 달리 그 본질들을 잘 이해한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쓴 것 같습니다. (실전 참전 경력은 없다고 합니다만)
그리고 전장에서 벌어진 여러 사실들을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려고 하지 않고 다만 "이해"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 인상깊습니다.
그것도 저자가 일생의 많은 부분 동안 직업으로서 군복을 입고 보낸 이력의 덕이겠지요.
거의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인데 손에 들고 나서 떼지 않고 하룻만에 다 읽어버렸네요. 존 키건 작 "전투의 실상"을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었는데 내용적으로도 그 작품와 비슷한 관점이라고 느꼈습니다.
이곳 논단에서 다른 책 소개할 때 "이 책을 안읽어본 사람하고는 앞으로 이와 관련된 주제에 관해 얘기하기 힘들 것 같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었는데, 이 책에서도 역시 그런 느낌을 받았고요.
군사 전문 번역작가인 에뜨랑제 이동훈님이 작업하셨는데 흠잡을 데가 거의 없고 독서에 몰입할 수 있는 최고의 퀄리티를 내주신 것 같습니다.
덕분에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는 좋은 저작을 접할 수 있었네요.